[원화 1300원시대]①한국경제 환란(換亂) 지옥행 열차 탔나

입력 2022-07-06 17:51수정 2022-07-07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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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달러 환율 추이 (신미영기자 win8226@)
“사장님네 회사처럼 수출을 많이 하는 기업은 환율에 따라 수익이 왔다 갔다 하니 헤지하는 상품 하나쯤 들어놔야 해요.” 매출 300억 원대의 전자부품업체를 운영하는 남부러울 것 없이 부자였던 그는 2008년 2월 운명의 키코(KIKO)에 코가 꿰였다. 3월 부터 환율이 오르더니 채 두달이 가기 전에 녹인 선을 넘어섰다. 순식간에 수십억 원대의 손실이 났다.

#제지업체 자금담당 임원 A씨는 요즘 하루하루가 피가 마른다. 제지를 수출해 얻은 환차익이 반갑지만, 원자재인 펄프 가격이 급등한 데 따른 비용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다. 공급난에 웃돈을 준다 해도 원자재를 제때 조달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그는 “수출과 수입을 모두 신경을 써야 하는 우리 같은 기업에 환율 1300원대 진입은 ‘양날의 검’과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1300원. 서로 다른 시기의 ‘환율 잔혹사’(2008년 금융위기, 2022년 자이언트 스텝)를 보여주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2008년은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된 미 행정부의 주택 부양책, 미 중앙은행(Fed)의 저금리 정책, 은행들의 무분별한 주택담보대출 등)가 상대적으로 제조업과 금융이 취약한 곳과 신흥국 등으로 전파된 시점이다. 2022년 현재는 미국발 여진이란 과정은 비슷하지만, 내용 면에서 물가를 잡기 위한 ‘자이언트 스텝’에 댈한 두려움이자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상승)에 대한 공포란 점은 다르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차질, 에너지 가격 상승, 기업 이익 둔화(무역수지악화), 외국인 이탈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외풍에 쉽게 흔들리는 허약한 금융시장의 체질도 한몫한다.

시장 참가자들은 환율 세계는 “전망은 신의 영역”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 2009년 달러당 원홧값이 1600원에 근접할 당시에는 1800원까지 추가로 떨어질 것이라는 추측들이 난무했지만 원홧값은 이를 비웃듯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고, 1200원대 진입은 시간문제라는 전망이 대세를 이루자 다시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처럼 변덕스러운 원홧값 향방에 마음 졸이는 건 결국 기업과 투자자들이다. 원자재를 수입하는 기업들이나 달러 부채가 많은 기업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달러 예금을 갖고 있거나 자녀를 외국 유학에 보낸 사람, 여행이나 유학 계획이 있는 사람들은 원홧값 향방에 특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

환율 잔혹사

환율이 1300원 선을 넘나들자 시장 한편에서는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악몽의 기억을 꺼낸다. 1997년 800원이었던 원·달러 환율은 1년 만에 2000원에 육박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외환보유액을 쏟아부었고 그 결과 1997년 말 외환보유액언 20억 달러로 뚝 떨어졌다. 이후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된 정부는 IMF에 손을 뻗게 됐다.

이후 비극은 예상된 것이었다. IMF는 우리나라에 자본시장 전면 개방, 고금리, 재정 긴축 등 혹독한 조건들을 요구했다. 이 탓에 금리는 연 20%대까지 치솟았다. 은행 등으로부터 자금을 차입한 기업들은 이자를 부담하지 못해 도산했으며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단행됐다. 2001년 8월, 우리나라가 빌린 돈을 모두 상환하면서 IMF 관리 체제에서 벗어나자 환율도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환율은 1600원 가까이 뛰었다. 이후에도 2010년 유럽 재정 위기, 2016년 중국 신용 위기, 2019년 미국-중국 무역 분쟁, 2020년 코로나19 등 대외 리스크가 불거질 때마다 환율은 등락을 반복했다.

올해 코로나19로 풀린 유동성을 회수하기 위해 전 세계가 긴축을 강화하자 환율은 또 급등하고 있다. 국내 외환보유액도 점차 감소하는 추세다. 외환시장에서 변동성이 커지면 이를 완화하기 위해 외환 당국이 달러를 매도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말 우리나라 외확보유액은 4382억8000만 달러로 전달보다 94억3000만 달러 줄었다. 월로 따졌을 때 이는 2008년 11월 이후 13년 7개월 만에 최대 감소 폭이다.

▲원달러 환율 상승국면 업종별 환율 민감도

고환율이 반갑지만 않은 이유

원홧값이 하락은 수출기업이 가장 반기다. 가격경쟁력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경기가 잿빛인 상황에서는 원자재를 해외에서 들여오는 기업의 비용 부담만 키우는 악재로 작용한다. 유류비를 달러로 결제하는 항공사들이 단적인 예다. 이미 환율 급등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올해 1분기(1∼3월) 공시에서 대한항공은 원-달러 환율이 10원 오르면 환 손실이 410억 원 발생하고 아시아나항공은 환율이 10% 오르면 세전 순이익이 3594억 원 감소한다고 밝혔다. 달러로 항공기 대여(리스)료, 유류비, 영공 통과료 등을 결제해야 하는 만큼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수출은 환율보다 세계 경제 지수에 더 영향을 받는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하는 한국 경기선행지수(CLI)는 작년 7월을 정점으로 꺾이고, 세계 경기는 더 악화되는 상황”이라며 “이런 상황에서는 수출기업들이 환율 수혜를 보기 어렵다”고 했다.

기업들과 시장이 더 걱정하는 것은 ‘나쁜 고리’다. 치솟는 달러(원홧값 하락)가 수입물가를 끌어올려 외환위기 이후 23년 7개월 만에 6%로 치솟은 소비자물가 상승 압력(수요 둔화, 경기 침체, 실적 감소)을 더 높일 수 있다. 화폐가치 하락으로 장바구니 물가가 급등하면 서민 살림살이는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주머니가 가벼워지면 기업들이 만든 물건을 사는 데 인색해지고, 이는 기업 실적 감소, 경기 침체라는 악순환 고리를 만들 수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실장은 “우리나라 통화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의 통화도 약세여서 환율 상승이 수출에 미치는 효과는 크지 않은 것 같다”며 “대신 수입 물가를 올리는 등 물가를 자극하는 요인이 더 큰 것 같다”고 말했다.

한층 짙어진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 공포는 수출에도 그림자를 드리운다. 물가가 오르면 그 나라의 물건 가격이 올라가면 외국인들이 비싸진 물건을 사지 않으려고 해서 수출은 줄어든다.

환율이 단기간 크게 오른 영향(이자 부담 상승)으로 민간 영역에서 부실이 생길 위험도 커졌다. 올해 1분기 말 기준 한국 기업의 대외채무는 작년 말보다 30억9150만 달러(약 3조9800억 원) 늘어난 1483억3400만 달러(약 190조9800억 원)에 달했다.

▲환율 수준별 일평균 외국인 순매수대금

서민도 투자자도 힘겨워

서민들도 치솟는 달러에 걱정이 많다. 미국에서 대학원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박모 씨(31)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환율 시세를 들여다본다. 한국에서 부모님이 매달 생활비 3600달러를 송금해 주는데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서 지난해 말보다 수십만 원 이상이 더 들기 때문이다. 박 씨는 “생활비 부담 때문에 학업에 집중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주식 투자자는 추락하는 원화 가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또 어떻게 포트폴리오를 가져가야 유리할까.

한국투자증권이 1200원대 환유를 보인 2000년 10월~2002년 4월 시장을 분석한 결과 소매, 유통, 보험, 자동차업종이 수익률 상위에 이름을 올렸다, 반면 소프트웨어, 유틸리티, 가전 등은 부진했다. 2007년 11월~2009년 2월엔 소프트웨어, 통신, 반도체가 상승했고 조선과 건설, 기계는 하락했다. 2010년 5월엔 자동차, 화장품, 의류를 중심으로 상승했고 상사, 자본재, 조선 등을 중심으로 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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