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박광수, 백래시의 시대 “큰 소리로 함께 말하면 변화 온다”

입력 2022-08-0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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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박광수 집행위원장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규모는 작지만, 다들 단단한 여성영화제들이었습니다. 반면 우리 영화제는 연 5만 명이 참석하는 대중적인 여성영화제라는 점에서 변별점이 있더라고요.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컸죠. 베를린영화제 최초의 여성 집행위원장인 마리에트 리센벡(Mariette Rissenbeek)도 그걸 알고는 서울시의 문화적 랜드마크가 우리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아니겠냐고 하더군요.”

팬데믹이 오기 전인 2019년, 박광수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세계 3대 영화제로 손꼽히는 베를린영화제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머리 스타일도, 피부색도, 몸집도 다르지만 전 세계에서 ‘여성영화제’를 운영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이들이 인적 교류를 위해 오스트리아 대사관으로 모여들었다. 대부분 여성학에 중점을 둔 포럼 중심이거나 액티비즘 성격을 띠는 소규모 여성영화제에 소속된 이들이었다고 한다.

박 집행위원장은 그때 여성영화제가 한국, 그리고 수도 서울의 높은 문화적 수준을 대변할 수 있는 행사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했다.

25일 개막하는 여성영화제에 앞서 박 집행위원장을 지난 1일 서울 상암에서 만났다. 그는 “1997년에는 한국의 여성 감독이 고작 7명이었다. 지금은 많이 늘어났지만, 그럼에도 큰 자본이 드는 영화에는 여전히 여성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별로 없다. 여성 영화인에 대한 더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여성영화제 역할을 설명했다.

여성영화인 작품을 상영하고 지원할 목적으로 1997년 첫 발을 뗀 여성영화제는 올해로 24회째를 맞는다. 20억 원이 채 되지 않는 예산이지만 팬데믹 전인 2019년 5만여 명의 관객 발걸음을 끌어내며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 통상 18~19만 명이 찾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부산국제영화제가 100억 원의 예산으로 치러지는 걸 고려하면 투입 대비 알찬 성과다.

지난 6월 서울시의회에서 ‘서울특별시 국제영화제 지원 조례안’이 통과된 만큼, 박 집행위원장은 서울시의 적극적인 재정 지원 필요성을 강조했다. 조례안은 지난해 개정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법률(영비법)’에 따른 것이다. “서울특별시장은 국제영화제의 위상 강화 및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시책 및 지원방안을 마련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한다.

여성가족부 폐지가 대통령 공약이 되는 ‘백래시의 시절’에도, 여성영화제는 구조적 성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창작자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분명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박 집행위원장은 "과거 인권을 ‘롸이츠 오브 맨(Rights of man)’이라고 불렀지만 이제는 ‘휴먼 롸이츠(Human Rights)’라고 한다. 백래시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설 때도 있지만 사회는 어쨌든 (성평등이라는) 하나의 가치로 향해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1일 서울 상암 스탠포드코리아에서 열린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공식 기자회견에 박광수 집행위원장 (왼쪽에서 세 번째)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다만 영화계에는 여전히 성 불평등이 있다고 짚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2020년 발표한 ‘한국영화 성평등 정책 수립을 위한 연구’에 따르면 지난 10년(2009~2018) 동안 개봉을 경험한 영화감독은 1525명이고, 이 중 여성은 176명에 불과하다. 10명 중 1명에 그친 꼴이다.

흥행한 상업 영화 감독을 추려보면 문제는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역대 한국영화 중 최고 흥행작 상위 10위에 오른 ‘명량’, ‘극한직업’, ‘신과함께- 죄와 벌’, ‘국제시장’, ‘베테랑’, ‘괴물’, ‘도둑들’, ‘7번방의 선물’, ‘암살’, ‘광해, 왕이 된 남자’의 감독은 모두 남성이다.

이는 ‘큰 영화는 남성 감독에게 맡긴다’는 영화 산업의 오래된 남성중심적 시각과 무관치 않다. 박 집행위원장은 이같은 고정관념이 한국의 영화산업 위기를 초래하는 측면이 있다고 봤다.

“많은 자본이 들어간 상업 영화가 판판이 관객으로부터 호응받지 못하고 있잖아요. 사람들이 통상적인 관점의 이야기는 이제 지겹고 재미없다고 말하는 거죠. 그건 다르게 얘기하면 ‘창의성’에 관한 문제일 수 있어요. 창의성은 다른 안경을 끼고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 아니겠어요. 그건 예술의 핵심 정신이기도 하죠."

여성주의적 관점을 지향하는 여성영화제가 그 대안을 찾는 훈련과정이자 주요 무대가 될 수 있다고도 했다. 여성영화 창작자들에게 제작비를 지원하는 경쟁 프로그램 ‘피치&캐치’는 대표적인 행사다. 12회 째를 맞는 올해는 총 6600만 원 규모의 상금과 현물 후반작업을 지원한다. 그간 이 행사를 거쳐 김혜수 주연의 누아르물 ‘차이나타운’, 전 세계 59관왕에 오른 김보라 감독의 독립영화 ‘벌새’ 등 의미 있는 여성서사 작품이 완성됐다.

“여성주의적 관점은 새로운 예술 창작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관점을 비틀어보는 작품이 더 활발하게 만들어질 수 있을지 고민하거든요. 그게 곧 한국 영화 산업의 미래이기도 하니까요.”

여성학을 전공한 박 집행위원장은 2019년 취임해 올해로 4년째 영화제를 이끌고 있다. 17대 국회에서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보좌관 생활을 하면서 문화계 담당자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관련 정책의 이해를 높인 게 도움이 됐다.

신인 여성 감독에게 단편영화 제작비를 지원하는 ‘젠더X필름’ 프로젝트는 박 집행위원장 취임과 동시에 시작했다. 여가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지원을 끌어내면서다.

“여성에게는 일상적인 경험이라 영화로 만들려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수 있어요. 그때 누군가가 ‘이런 게 영화로 만들만 한 얘기야?’ 같은 말을 하면 창작자는 반드시 영향을 받게 돼 있습니다. 기세가 꺾이는 거죠. 그때 여성영화제가 나서서 ‘이거 네 마음대로 만들어도 돼’라는 이야기를 해주면 그때는 안심하고 자기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거든요.”

‘여성운동’과 궤를 같이하는 활동도 진행 중이다. 여성 의제에 목소리를 높인 이들을 선정해 공로를 인정하고 시상하는 ‘올해의 보이스’ 프로젝트다. 그간 여성영화제는 미투 운동에 나선 서지현 검사, 추적단 불꽃으로 활동한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 래퍼 슬릭 등을 공식적으로 호명하며 그들 활동에 지지를 표했다.

박 집행위원장은 “여성영화제는 가치지향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 사회에서 여성영화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개인이나 단체가 있다면, 고마워하고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해낸 역할이 결국 영화에 영감을 주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다시 사회에 영감을 줍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 말미 루이자 메이 올컷의 소설 ‘작은 아씨들’ 이야기를 꺼냈다.

“글 쓰는 주인공 조가 그러죠. ‘쓸 게 없어.’ / 그러자 에밀리가 말합니다. ‘우리가 수다 떨고 빵 만드는 얘기를 써봐.’ / 조가 다시 물어요. ‘누가 그런 걸 보겠어?’ / 똑똑한 에밀리가 이렇게 답합니다. ‘많이 쓰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중요한지 모르는 거야’ 라고요. / 큰 소리로 함께 말할 때, 변화는 이루어집니다.”

<용어설명> 백래시
원래 공학 용어다. 기계에 쓰이는 나사나 톱니바퀴 등이 서로 맞물려 운동하는 기계 장치에서 나아가는 방향 뒤에 생기는 틈새 사이가 벌어지면 소음이나 진동이 심해짐을 의미한다. 이 현상을 사회에 비유하면 진보에 대한 반발과 저항의 뜻으로 쓰인다. 즉 사회적 진보 또는 변화에 대해 대중의 반발과 저항을 말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에서는 '안티 페미니즘' 현상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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