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행(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소장)
이 가운데 17조3000억 원 규모로 배정한 농림축산식품부의 편성안에 농업, 먹거리 관련 시민사회가 규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현 정부가 ‘식량주권 확보와 농가 경영안정 강화·먹거리 지원’이라는 국정과제를 제시하고 반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예산안에는 그동안 먹거리 생산자들을 일부라도 지원하는 역할을 해온, 임산부 친환경농식품 지원사업, 초등돌봄교실 과일간식 지원사업, 저소득층 농식품바우처 사업 등 먹거리 관련 사업을 아예 폐지하였다. 모두 합해 450억 원 규모의 예산이었지만 임산부, 초등학생, 학부모, 저소득층과 이들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해 공급하는 농민들에게는 만족도가 높은 사업이었는데 이를 삭감하여 건강한 먹거리 체계 전환의 디딤돌마저 치워버리고 있는 것이다.
농(農) 시민사회는 정부 스스로 제시한 국정과제를 정권을 잡자마자 바로 헌신짝처럼 내다 버리는 정치 행태에 분노하고 있다. 코로나19, 기후위기와 이상기후 빈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전 세계 식량난 등으로 인해, 식량주권과 친환경농업의 중요성 및 전 국민의 바른 먹거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전환이 시급한 상황에서 이러한 결정에 어이없어 하고 있다. 해서 예산안 심의과정에서 정부와 국회에, 먹거리 취약계층과 국내 농업·농촌을 보호하는 지원사업 예산을 복원 확대하고, 이의 안정적인 추진을 위한 통합추진체계 구축을 요구하고 있다.
국가의 기본책무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국민 누구나 건강한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고 공급받을 수 있는 ‘먹거리 기본권 보장’은 정치를 넘어서는 가치의 문제이다. 현 정부가 내세운 ‘식량주권’은 건강한 먹거리의 안정된 생산과 소비에 참여하고 누릴 권한이 주권자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국가는 행정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국가가 식량주권을 갖는다는 것은 국민의 입에 먹거리를 공급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지속 유지될 수 있도록 먹거리의 생산을 안정화하고, 그 생산기반인 농촌사회를 유지하며, 상당수의 중소농, 가족농이 농사지어 국민 먹거리에 기여하는 생산과 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질적으로도 건강한 먹거리의 생산과 소비가 지속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다. 이를 소홀히 하여 지금의 농촌 과소화로 나타나는 지역위기를 낳고 사회양극화를 부추겨온 국가의 역할을 정상화하는 것이다.
정부는 농림축산식품부라는 통합된 이름으로 담당을 두고 있지만, 여전히 먹거리의 생산과 소비를 갈리치며 통치하려 한다. 그래서 아직도 국내 생산은 경쟁력이 없으니 최소한으로 유지하고, 모자라는 먹거리는 다른 걸 팔아 벌어들인 달러로 사다가 먹으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자본경제 변동이나 기후위기로 곡물 생산국이 수출을 금지하는 상황에서 소비 쪽도 수급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식량폭동과 정치전환이 일어나는 사례를 근래에도 보지 않았는가. 자급력을 어느 정도라도 확보하지 못하면 수급으로 생산기반의 취약함을 가리는 국가경제는 오래 가지 못한다.
하기는 성장, 혁신 산업이라며 지원하여 이룩한 국내 생산기반과 그 생산물을 가지고서도 경제외교적 무능함으로 수출하지 못해 국내 일자리도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에, 뒷전으로 밀려있는 농업, 먹거리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찾으라고 하는 것 자체가 과한 욕심일까. 그래도 정부 일각에 식량주권의 제고와 회복을 위한 정책 실천에 의지가 있는 이들이 있을 터이니 시민사회는 이를 적극 응원하고 도울 것이다. 그리고 국회는 예산심의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우려를 경청하고, 먹거리 기본권, 식량주권의 확보 요청에 적극 나설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