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제로백 3.5초…기아가 만든 ‘하이퍼 카’ EV6 GT

▲EV6 GT가 마른 노면에서 드리프트 중이다. EV6 GT는 기아 최초로 ‘드리프트(drift) 모드’를 갖췄다. 이런 액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은 방망이질 친다. (사진제공=기아)

1990년, 넘어설 수 없는 장벽으로 여겨졌던 제로백(정지상태→100km/h 가속) 10.0초의 기록이 무너졌다. 주인공은 현대차 스쿠프 터보. 그가 만든 9.7초의 기록은 당시 기준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폭발력이었다.

30여년이 지난 오늘. 한국차 역사상 가장 빠른 차가 등장했다. 역사를 새로 쓴 이번 주인공은 기아의 전용 전기차 EV6를 밑그림으로 한 고성능 버전 EV6 GT다.

제원부터 남다르다. 최고출력 585마력, 최대토크 740Nm의 강력한 구동 성능을 갖췄다. 최대토크는 가솔린 7500cc와 맞먹는 육중한 수치다. 제로백은 3.5초. 역대 국내 완성차 가운데 가장 빠르다. 수퍼카를 넘어서 하이퍼 카의 반열을 충분히 도전장을 던질만한 수준이다.

진가는 충남 태안에 새로들어선 'HMG 드라이빙 익스피리언스 센터'에서 펼쳐졌다. 차고 넘치는 고성능을 일반 공도에서 누릴 수 없는 노릇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운영하는 HMG 드라이빙 익스피리언스 센터는 △제동 코스 △마른 노면 서킷 △젖은 노면 서킷 △고속주회로 △다목적 주행 코스 △젖은 원선회 코스 △킥 플레이트(kick plate) 코스 △오프로드 코스 등 8개 코스를 갖춘 주행 시험장이다. EV6 GT가 고성능 전기차를 표방하는 만큼 체험에 적합한 장소다. 이날은 다목적 주행 코스, 젖은 노면 서킷, 마른 노면 서킷, 고속주회로 등 4개 코스를 체험했다.

먼저 드라이빙 센터를 떠나 가볍게 공도를 주행했다. 약 30분간 20여km를 주행하며 에코, 노멀, 스포츠로 구성된 드라이브 모드를 가볍게 체험했다.

전기차답게 가속 초기에 밀고 나가는 힘이 육중하다. 운전대 뒤쪽에 달린 패들 시프트를 통해 회생제동 강도를 4단계로 조절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일반 주행에서는 ‘잘 길들여진 말’처럼 온순한 느낌이었다. 고성능 전기차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차라는 생각이 들었다.

▲EV6 GT의 제로백 성능은 제원상 3.5초의 기록을 자랑한다. 스타트에 멈칫 실수했으나 기자 역시 3.8초를 기록했다. (사진제공=기아)

다음은 다목적 주행 코스에서 제로백 측정을 위한 드래그 주행을 했다.

신호가 정지에서 녹색으로 변하는 순간 가속을 시작하는 방식이었는데, 3번의 기회에서 기자의 가장 빠른 기록은 3.8초였다. 출발 반응이 빠르지 않았음에도 3초대의 제로백이 나올 정도로 강력한 성능을 엿볼 수 있었다.

▲젖은 노면에서도 E-GMP의 낮은 무게 중심을 앞세워 좋은 접지력을 보인다. 차고 넘치는 성능을 지녔으되 드라이버 스스로 손쉽게 '카운터 스티어'를 통해 자세를 바로 잡을 수 있다. (사진제공=기아)

젖은 노면에서는 EV6 GT의 안정감은 뚜렷하다.

11개의 코너, 1.6km로 이루어진 이 트랙에서 EV6 GT는 뛰어난 안정감을 자랑했다. 안전을 위해 빠른 속도로 주행하지는 않았으나 가볍게 젖은 곳은 물론 수막현상이 생길 정도로 물이 고인 곳에서도 차가 바닥에 딱 붙어 안정적으로 주행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아 최초로 적용된 ‘드리프트 모드’를 사용해 차량 선회를 시도해보는 등 EV6 GT에서만 가능한 움직임도 체험했다.

▲공도 주행에서는 일반적인 전기차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한없이 편하고 조용하며 육중하다. (사진제공=기아)

EV6 GT의 제대로 된 성능은 다음 두 코스에서 느낄 수 있었다.

레이싱에 가장 가까운 경험을 할 수 있는 마른 노면 코스에서는 급가속과 급회전 등을 통해 차량의 가속, 제동, 회전 전반의 성능을 체험할 수 있었다. 주행 모드가 스포츠에 가까워질수록 공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속도감이 느껴졌다.

특히 인스트럭터가 직접 운전하는 ‘택시 프로그램’으로 동승했을 때 GT 모드의 레이싱 감성이 제대로 느껴졌다. GT 모드는 아반떼 N, 벨로스터 N 등 N 라인의 ‘N 모드’처럼 차량의 구동 관련 성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모드다. 빠른 가속, 감속은 물론 급회전 시 들리는 타이어 마찰음, 몸이 한쪽으로 쏠리는 느낌까지 드는 극한의 주행 상황에서도 성능을 뽐내는 ‘야생마 같은 주행 질감’이었다.

▲EV6 GT가 약 39도 각도의 고속주회로의 뱅크 코스를 달린다. 200km/h가 넘는 고속에서도 차 안은 한없이 여유롭다. (사진제공=기아)

이어진 고속주회로에서는 시속 200km가 넘는 속도에서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역시 안전상의 이유로 인스트럭터가 운전대를 잡는 ‘택시 프로그램’을 이용했는데, 약 39도에 달하는 경사를 가진 트랙을 시속 220km 이상으로 달리면서도 차체 떨림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 직선 코스에서 제원상 최대 속력인 260km/h까지 도달해도 풍절음 외에 차체 소음이 크게 느껴지지 않기도 했다. 약 600마력에 달하는 출력이 단순히 제원상 극한의 수치를 뽑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주행을 맡은 인스트럭터는 “EV6 GT가 이런 속도로 달리면서도 차체 안정감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고성능 전기차에 걸맞게 단단한 서스펜션, 공기역학을 고려한 디자인 등 여러 요인들이 영향을 끼친다”라고 설명했다.

EV6 GT는 기아가 강조한 그대로였다. ‘고성능 전기차’다운 면모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덕분에 차에 오르는 순간, 운전자가 아닌 '드라이버'가 된다.

공도에서 그를 만난다면 심기를 건드리지 말기를. 어설프게 도전장을 던졌다가 자칫 멋진 뒷태마저 감상할 기회마저 놓칠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