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은 배우 김주령에게 연기 인생의 생명을 연장해준 작품이다. 그가 연기한 한미녀는 목숨을 건 게임에서 살아남아 거액의 상금을 타기 위해 폭력적이고 비열한 남자 장덕수(허성태)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지독하리만큼 뜨거운 생존의 열망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아, 오징어 게임의 그 미친 여자!’ 하면 누구나 알아들을 정도로 전 세계 시청자의 뇌리에 강렬한 인장을 새겼다.
지난 6일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김주령을 만나 그의 지난 시간을 청해 들었다. 장건재 감독의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주연 배우로 공식 초청된 그는 ‘오징어 게임’에 합류하게 된 시점부터 신작 영화를 촬영하고 관객 앞에 다시 서게 된 지금까지 고통과 슬픔, 기쁨과 감사함을 모두 느꼈다고 했다. “이제는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도 전했다.
김주령은 배우로서 혹독한 시기를 거쳤다. 연극 연출을 전공한 남편의 유학길을 따라 미국에 갔다가 딸을 출산하는 기쁨을 누렸지만, 2016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배우로 제대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따내는 게 쉽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밖으로 나가 무슨 역할이든 가리지 않고 연기했지만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겠더라고요. 현장에서도 생각이 많았어요. 남편도 유학 이후 좋은 자리를 찾지 못했죠. 경제적으로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 구사일생의 ‘콜’을 보낸 게 ‘도가니’(2011)로 인연을 맺었던 황동혁 감독이다.
“2020년 초쯤 더 이상 한국에서 배우 생활에 미련이 없다고 생각할 시기였어요. 황 감독님에게 전화가 와서는 뜬금없이 ‘내년에 뭐 하시냐’고 하더라고요. ‘뭐 없습니다’, 그랬죠. 미국으로 돌아갈 거라는 얘기는 안 했어요. 사람이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요. 역할을 하나 주실 수는 있겠다 싶더라고요.”
‘오징어 게임’의 대본을 받아보고 자신이 맡게 될 한미녀 역할의 중요도를 알게 된 순간, 그는 크게 놀랐다고 한다. 언젠가 사적인 자리에서 만난 김주령은 이 대목을 이야기하며 눈시울을 붉혔는데, 이번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힘들었던 자신에게 큰 기회를 준 황 감독에게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고마움을 느끼는 듯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비중이 훨씬 컸어요. 한미녀 역할은 김주령을 위한 것이니 (누구도) 건드리지 말라는 이야기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시나리오가 워낙 재밌어 잘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당시에는 결과가 어떻든 간에 이 작품에 출연하는 것 자체가 하늘이 다시 준 기회처럼 느껴졌어요.”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역대 최다 시청 횟수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한 끝에 그는 미국배우조합(SAG)상 시상식에 참석하고, 할리우드 스타와 대면하며 더 큰 영화산업의 일면을 엿볼 기회를 얻는다.
이날 김주령은 시상식 쉬는 시간 화장실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배우 산드라 오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머’ 소리를 내며 끌어안고 사진을 찍은 일화, 평소 좋아하던 가수 레이디 가가가 곁에 다가선 자신을 흔쾌히 맞으며 일어서자 외신 기자들이 구름같이 몰려와 플래시를 터뜨린 일 등을 즐거운 얼굴로 전했다.
“미국에서의 반응은 가히 열광적이었어요. SAG는 할리우드 스타가 많이 오는 시상식인데 ‘오징어 게임’의 배우는 그분들의 스타더라고요. 그들이 우리를 보면서 신기해했죠. 기분이 정말 묘하더라고요.”
일련의 경험 이후 김주령은 본격적으로 영어를 배우며 미국 작품 출연 기회를 얻기 위해 도전 중이라고 한다. 11월 디즈니+를 통해 공개되는 강윤성 감독의 ‘카지노’에서 필리핀으로 이민 간 교민 역을 맡아 영어 연기를 선보인다는 그는 “쉽지는 않았지만, 일단 한번 해봤으니 ‘까짓거 하면 되지’ 싶은 것”이라며 웃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신작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를 통해 연극 연출가인 남편과 이별을 예감하는 대학 교수 주희 역을 맡아 담백하고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를 맛깔나게 소화한다.
김주령은 장건재 감독과 첫 만남을 성사시켜준 ‘잠 못 드는 밤’(2013)의 주인공이 ‘30대 주희’ 였다면 이번 작품의 화자는 ‘40대 주희’라면서 “내 인생과 영화가 같이 가고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징징댄 적도 많죠.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러지 않아요. (관객의 사랑을 받았으니) 저도 이제는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배우로서 더 잘 돼서 주변에 정말 좋은 영향력을 미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