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빠진 K-제약바이오 육성 정책
“내년 정부 투자 예산 규모가 줄어 실망이 크다.” “제약바이오를 제2반도체로 키운다고 했지만 투자확대·규제개선·위원회 설치 등 국정과제에 포함된 정책 추진이 너무 더디다.” “바이오업계 투자유치가 너무 힘들다. 오죽하면 바이오업계 보릿고개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최근 만난 국내 제약바이오업계 관계자들의 한숨 섞인 하소연이다. 이유는 많다. 정부의 정책 추진에 속도가 나지 않고 있다. 민간 투자 마중물 역할을 할 정부 투자는 규모가 줄었다. 민간 투자는 얼어붙었고, 바이오 회사들의 기업공개(IPO) 시장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다.
올해 초만 해도 정부 제약바이오산업 육성에 대한 업계 기대감은 높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대한민국 제약바이오산업을 적극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왔다. 이를 위한 컨트롤타워로 대통령직속 제약바이오혁신위원회 설치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당선인 시절에는 국산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한 SK바이오사이언스 공장을 찾아 현장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에는 ‘보건안보전략기술 집중투자와 글로벌 협력강화로 백신‧치료제 강국 도약’을 담아 육성 의지를 재차 확인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다. “제약바이오를 핵심전략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말이 무색하다. 업계에선 “힘 빠진 K-제약바이오 육성 정책”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제약바이오혁신위원회 설치는 감감무소식이다. 지난달 말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회 인사청문회 당시 위원회 설치에 대해 “관계부처와 적극 협의하겠다”고 밝혔으나, 업계 기대는 크지 않다. 정부가 각종 위원회를 대폭 줄이는 상황에서 권한 없는 구색 맞추기 위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투자 활성화 정책에도 실망하는 분위기다. 지난 8월 복지부의 대통령 업무보고 당시 발표했던 1조 원 규모의 ‘K-바이오백신펀드’가 당초보다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K-바이오백신펀드는 혁신 신약개발과 백신 자주권 확보가 목적이다. 초기자금으로 보건복지부가 1000억 원, 국책은행이 1000억 원을 출자하고 펀드운용사와 민간투자 유치로 올해 5000억 원이 조성된다. 계획상 내년에도 5000억 원을 조성해야 하지만 복지부 내년 관련 예산은 100억 원으로 대폭 줄었다.
국내 제약바이오업계는 투자금 유입 감소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올해 상반기 국내외 벤처캐피털(VC)의 바이오·의료 신규 투자는 6758억 원으로 지난해 상반기 보다 약 1300억 원 감소했다. 신약개발 등 기술력을 인정받아 기업공개(IPO)를 준비하던 회사들도 투자유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상장계획을 철회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업계는 정부의 펀드 조성에 기대를 걸었다. 펀드 1조 원은 업계가 바랐던 규모는 아니어도 얼어붙은 민간투자를 확대할 촉매가 될 수 있어서다. 그런데 내년 예산 대폭 감소로 결국 기대는 실망으로 변했다.
그럼에도 국내 제약바이오기업들은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최근 수년간 혁신 신약개발, 의약품 위수탁생산(CDMO)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입증했다. 산업계 스스로 K-제약바이오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성과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수년간 적자였던 국내 의약품 무역수지는 2020년 1조3940억 원 흑자로 돌아섰다. 지난해 보건산업 수출액은 257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였다. 연구개발 투자도 2020년 3조2904억 원으로 늘었다.
고용에서도 큰 몫을 했다. 최근 발표된 제약바이오협회와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20년까지 10년간 제약바이오산업 연평균 고용증가율은 제조업(0.8%)의 6배에 달하는 4.9%다. 제약바이오기업들이 청년고용과 정규직 채용에 앞장서며 고용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제약바이오기업들은 기존 틀을 깨는 ‘혁신’, 적극적인 ‘투자’, 분야를 가리지 않는 ‘협력’에 기반해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 신화를 쓰고 있다. 업계가 정부에 바라는 것은 하나다. ‘혁신·투자·협력’을 위한 제약바이오산업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