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영 국제경제부 차장
판세를 좌우할 주요 격전지에서 트럼프가 ‘꽂은’ 후보들이 줄줄이 패배를 맛봤다. 펜실베이니아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트럼프 지지를 받은 메흐멧 오즈가 올해 초 뇌졸중 진단을 받고 건강 우려가 불거진 민주당의 존 페터먼에게 졌다. 버지니아에서는 트럼프가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를 위한 여전사”로 치켜세웠던 웨슬리 베가가 민주당 현역을 넘어서지 못했다. 트럼프 열성 지지층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의 음모론을 추종한 허셜 워커는 조지아 상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에게 뒤진 채 결선에 진출했다.
반면 트럼프와 거리를 둔 공화당 후보들은 선전했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텃밭인 플로리다에서 공화당 내 트럼프 경쟁자인 론 드샌티스 주지사는 20%포인트(p) 차이로 압승을 거뒀다. 트럼프의 선거 사기 주장에 맞섰던 공화당 소속 조지아 현역 주지사인 브라이언 켐프도 민주당 후보를 8%p 앞서며 자리를 지켰다.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을 택한 게 아니라 트럼프를 버렸다. 2021년 1월 6일 지지자들의 의회의사당 폭동을 백악관에서 TV로 지켜보며 민주주의를 농락했고, 선거 사기 주장으로 사회 분열과 갈등을 조장한 트럼프를 거부한 것이다. 대선 사기 주장에 동조한 ‘트럼프의 아이들’ 일부가 의회 진출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주요 격전지 승부는 미국 정치의 자정작용이 아직 가능함을 보여줬다. 1·6 의회 폭동 이후 독재자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미국 민주주의의 체면을, 중도가 지켜낸 셈이다.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의 표현처럼 미국은 화살을 피했다. 그러나 올해 세계 민주주의는 치명상을 입었다. ‘지정학적 대지진’ 여파다. 유럽과 중동, 아시아에서 극우와 포퓰리즘, 독재가 세(勢)를 키웠다. 이탈리아에서 ‘파시즘 후예’ 조르자 멜로니가 총리에 올랐고, 프랑스에서는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의 국민연합이 주류에 합류했다. 스웨덴에서도 네오 나치에 뿌리를 둔 스웨덴 민주당이 원내 2당을 차지했다. 높은 에너지 가격과 경제난에 지친 민심을 극단이 파고든 결과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높은 에너지 가격으로 유럽 경제가 어려워지고 사회적 혼란이 생기면 사람들은 고통받는 지갑을 보며 투표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극우가 득세하는 세계질서를 만들어놨다는 점에서 푸틴은 원하는 걸 이뤘을지 모른다.
아시아는 더 큰 파동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중화제국 부활을 꿈꾸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절대권력의 폐해를 경험한 덩샤오핑이 이를 막기 위해 구축한 집단지도체제를 뭉개고 1인 천하의 길을 열었다. 내부 불만이 없지 않다. 중국 통일을 달성한 마오쩌둥, 경제발전을 이룩한 덩샤오핑과 같은 반열에 오를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시 주석이 ‘스펙’을 쌓는 길은 단 하나, 대만 ‘수복’이다. 양안 통일은 중화제국 복귀라는 역사적 사명과 장기집권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최상의 카드다. 시 주석의 네 번째 임기가 결정되는 2027년 이전, 대만 침공설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역사상 가장 위험한 ‘쓰나미’가 몰려오는 셈이다.
‘지정학적 대지진’으로 30년간 지속된 평화의 시대가 저물었다. 미국의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안보가 보장되고, 성장을 구가하던 좋은 시절이 갔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는 최근 보고서에서 다극 체제로 재편된 세계질서는 실용보다 이념적 동맹이 주도할 것으로 전망했다. 과거의 낡은 사고를 버리고, 새 질서에 대응하는 유연함이 절실해지고 있다. 0jung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