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에너지 대란 고비를 넘겼다고 하지만 안심하기는 이르다. 유럽은 올 겨울을 대비해 가스 저장고를 90%가량 채운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가 가스관 벨브를 잠그기 시작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유럽이 가스 확보에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다. 예년보다 온화한 날씨도 벼랑 끝에 내몰린 유럽을 도왔다.
그러나 에너지 위기가 완전히 가신 건 아니다. 가스 가격은 과거 평균치보다 여전히 6배가량 높다. 러시아는 22일 현재 유럽과 연결된 마지막 가스관 운영 중단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코노미스트 분석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겨울에 에너지 가격이 10% 오르면 사망률이 0.6% 증가했다. 올 겨울 에너지 위기가 심화할 경우 유럽 전역에서 10만 명 이상 추가 사망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에너지 위기가 숨통을 조여오지만 해법 찾기는 산 넘어 산이다. 유럽 27개국이 각자 이해관계에 따라 접근하다보니 합의 자체가 난제다. EU 27개국 장관들은 2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에너지이사회 특별회의에서 가스 가격상한제 합의에 끝내 실패했다. 앞서 EU 집행위원회는 내년 1월부터 1년간 유럽 천연가스 가격 지표인 네덜란드 TTF 선물가격 상한제 발동 기준을 275유로(약 38만 원)로 설정하자고 공식 제안했다. 1메가와트시(㎿h)당 가스 가격이 275유로를 넘는 상황이 2주간 지속되고, 동시에 가스 가격이 액화천연가스(LNG)보다 58유로 비싼 상황이 10일간 지속되는 등 두 가지 요건이 모두 충족될 경우에 상한제가 자동 발동되는 방식이다.
에너지만 위기에 봉착한 게 아니다. 미국의 신보호주의 강화로 산업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막대한 지원금을 투입해 미국 중심 공급망을 짜는 데 앞장섰다. 에너지·제조·운송 분야에 4000억 달러를 쏟아 붓는 인프라법이 그 중 하나다.
기업들은 이미 미국의 보조금 정책에 반응하고 있다. 스웨덴 배터리 생산업체 노스볼트는 미국 생산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스페인 에너지 기업 이베르드롤라도 미국 투자 규모가 유럽보다 두 배 많다. 독일 화학 기업 BASF는 최근 유럽 운영을 영구적으로 줄이는 계획안을 공개했다. 기업인들은 유럽의 비싼 에너지 가격과 미국의 보조금이 유럽을 탈산업화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우려한다. 투자 위축은 유럽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세계 100대 기업 가운데 유럽은 14개에 불과하다.
미국의 보조금은 유럽과의 긴장을 키우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미국과 유럽이 단일대오를 유지했지만, 경제 갈등은 양국의 균열을 다시 부채질할 수 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자유 세계질서의 분열을 노리는 상황에서 미국과 유럽의 갈등은 지정학적 불안정을 키울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