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병을 꾸며 병역 면제를 시도한 금수저와 연예인, 운동선수들의 비리가 잇달아 발각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21일 뇌전증 증상을 허위로 꾸며 병역을 감면받게 한 브로커 구모 씨가 병역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된 것이 그 시작이었는데요.
이후 프로배구 OK금융그룹 조재성(27)이 연루 사실을 시인해 논란이 번졌습니다. 검찰은 스포츠 선수, 연예인 등 수십 명이 연루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요. 이들은 세세한 시나리오를 통해 뇌전증 환자인 척 연기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뇌전증을 위장해 병역을 면제받은 이들이 연달아 검찰 수사망에 걸려들고 있습니다. 직업군인 출신인 구 씨는 서울 강남구에 병역 문제 관련 사무소를 차리고 포털사이트 중개서비스를 통해 손님을 유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구 씨는 자신을 ‘군대 신검(신체검사), 재검, 현부심(현역복무부적합심사), 복무전환, 이의제기, 생감면(생계유지 곤란사유 병역감면) 전문가’라고 소개했는데요. 자칭 ‘병역의 신’인 구 씨는 병역 면제 대가로 한 사람당 최소 수백만 원에서 최대 수천만 원에 이르는 돈을 받아 챙긴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프로 배구 선수 조재성 역시 그를 통해 병역 회피를 시도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조 씨는 입대 연기를 위해 구 씨를 만났고, 뇌전증 소견 받는 법을 배운 후 재검 결과 사회복무요원(4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런 방법을 시도한 병역 회피 의심자에는 고위 공직자 및 법조인 자식, 프로 스포츠 선수와 연예인 등이 70명 이상의 인물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서울남부지검과 병무청은 지난달 초 뇌전증 진단 수법으로 병역 면탈을 돕거나, 면탈을 시도한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병역 면탈 합동수사팀’을 꾸렸는데요. 지난달 28일 구 씨 외 브로커 1명을 추가 적발해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2일에는 프로축구 K리그1(1부)에서 활동하는 선수 A 씨도 병역 면탈 비리와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죠.
SBS 조사에 따르면 매년 재검에서 뇌전증을 이유로 4급 보충역 이하 판정을 받은 사람이 200명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김영배 의원실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재검 대상 중 뇌전증 이유로 4급 이하 판정을 받은 사람 수는 △2018년 213명 △2019년 170명 △2020년 205명 △2021년 206명 △2022년 180명이었는데요. 브로커 구 씨가 범행을 시작한 2020년 2월부터 지금까지 같은 이유로 면제받은 사람 또한 200명 이상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국민일보 보도에 따르면 브로커가 뇌전증뿐만 아니라 ‘가짜 조현병’ 등 여러 정신질환을 이유로 면제를 시도했다고 합니다. 이에 검찰의 수사 폭은 더욱 넓어질 전망인데요. 검찰은 특정 의료기관과 유착 여부도 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혔습니다.
‘가짜 뇌전증’으로 병역 면제를 받는 수법은 조직적입니다. 브로커는 영화 대본처럼 시나리오를 만들어 제공하고, 자연스러운 ‘뇌전증 발견’ 상황 연출을 위해 가족들까지 동원했죠. JTBC는 브로커들이 출동한 구급대원에게 답변하는 법, 응급센터 진료 시 증상 설명하는 법, 의사 만났을 때 질문하는 법 등을 상세히 지시했다고 설명합니다.
뇌전증은 의식 소실, 발작, 행동 변화와 같은 뇌 기능의 일시적 마비 증상이 만성적,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뇌 질환입니다. 과거 간질이라고 불렸죠. 뇌전증의 가장 흔한 증상은 운동성 경련 발작이지만, 사람마다 증상의 정도와 양상이 크게 다릅니다. 눈꺼풀을 가볍게 깜빡이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거품을 물고 의식을 잃고 쓰러져 전신이 뻣뻣해지는 전신 발작을 일으키는 환자도 있습니다.
뇌전증 환자 10명 중 7~8명은 약물치료로 증상을 조절할 수 있고 일상생활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뇌전증 환자는 대개 병역 면제 대상으로 분류됩니다. 사격장에서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리고 있다가 발작이 일어나면 총알이 발사될 수 있는 것처럼, 경미한 증상도 군에서는 안전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병무청은 뇌전증의 치료 기간이 1년 이상일 경우 4급, 2년 이상을 경우 5급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4급은 보충역, 5급은 전시근로역으로 분류됩니다.
뇌전증이 속하는 경련성 질환에 대한 병역 판정을 받기 위해서는 3개월 이내 발행한 병사용 진단서와 의무기록지, MRI 및 뇌파검사 결과지, 항뇌전증약물농도검사(혈액검사) 결과지를 구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뇌전증 환자의 절반가량은 뇌파와 MRI 판독 결과지에 이상이 없다고 나옵니다. 환자별로 발작 증상도 다른 까닭에 의사들은 환자의 임상 증상이나 병력에 의존해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뇌전증협회 이사인 신동진 가천대길병원 교수는 쿠키뉴스와 인터뷰에서 “특별한 원인 없이 돌발적으로 발작이 일어나기 때문에 브로커가 마음먹고 속이려고 하면 의료진도 꼼짝 못 하고 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국민 반응은 뜨겁습니다. 누리꾼들은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프로축구 K리그1 선수 A 씨 색출에 나섰습니다. 고위 공직자, 유명 연예인, 국회의원 등 면제자와 공익으로 수색 범위를 넓혀 전수조사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죠.
한편 뇌전증 환자와 환자 가족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뇌전증 환자와 가족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뇌전증 환자가 병역 비리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지 않을지 걱정이다”, “이번 사태로 기존 환자들의 병역 검사 조건이 까다로워질까 봐 걱정이다. 자녀나 환우 당사자들의 피해가 없기를 바란다”는 의견 등이 나왔습니다.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전수조사와 엄격한 처벌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전문가들도 뇌전증 환자들의 피해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신동진 교수는 “안 그래도 사회적으로 부정적 낙인이 심한 질환인데 이번 사태로 인해 환자들에게 불이익이 갈까 봐 걱정”이라며 “오죽하면 어떤 환자들은 ‘차라리 동정이라도 받는 암이 낫다’할 정도인데 이를 악용하다니 개탄스럽다”고 말했습니다.
신원철 강동경희대병원 교수도 “뇌전증이 병역 비리의 대표적 질환이 될까 봐 우려된다. 뇌전증이 꾀병이라는 인식이 생겨선 안 된다”며 “이번 사태 때문에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들이 숨을까 봐 걱정된다”고 얘기했죠. 이들은 이번 사태로 뇌전증 병역 기준을 까다롭게 하면 뇌전증 환자가 군에 입대해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병역 기준을 강화하기보다는 악용 사례를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 처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