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주(민) 노동자] 5-1. 임금 체불 잔혹사
“지금 돈이 안 나와. 나 어떻게 필리핀 가요.”
7년 전만 해도 코트니(28·가명) 씨는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라고 생각했다. 모국인 필리핀이나 그 주변 국가에 비하면 손에 꼽을 정도로 잘 사는 나라였고, 미디어에 비친 한국 사람들은 매너도 좋아 보였다. 한국 행을 결심한 코트니 씨는 2016년부터 그토록 바라던 이 땅에서 이주노동자로 지내고 있다. 하지만 호감 일색이었던 한국에 대한 환상은 3년 만에 깨지고 말았다. 3년간 한국 생활을 마치고 모국으로 돌아가려 할 때 고용주가 자신의 국민연금을 빼돌린 사실을 뒤늦게 알면서다.
지난달 3일 경기도 포천 모처에서 본지와 만난 코트니 씨는 “She’s a liar(고용주인 여자 사장님은 거짓말쟁이)”라며 “(국민연금을) Pay(납부) 안 했어요”라고 말했다.
코트니 씨는 우리나라 정부가 초대한 필리핀 청년이다. 우리 정부는 2004년부터 필리핀 등 16개국과 고용허가제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맺고 이들 국가 청년들을 국내 사업장의 노동자로 초청하고 있다. 이 방식으로 코트니 씨처럼 2016년에 한국에 온 외국 청년들은 약 5만9000명이다.
고용노동부로부터 경기도 김포에 있는 제조업체를 알선받은 그는 한 달에 이틀 쉬며 3년간 박스를 포장했다. 저녁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밤을 꼬박 새우면 그는 약 300만 원을 월급으로 받았다. 이 중에서 고용주는 국민연금을 명목으로 월급에서 매달 수십만 원을 떼어갔다.
국내에 거주하는 18세 이상 60세 미만 외국인 노동자는 우리나라 근로자와 동일하게 국민연금에 가입하는 게 원칙이다. 다만 국민연금 가입 기간이 10년 미만이면, 출국할 때 반환일시금을 받을 수 있다. 반환일시금이란 출국으로 더는 국민연금 가입자 자격을 유지할 수 없어 그동안 낸 보험료에 이자를 더해 일시에 지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3년의 근무를 마치고 출국하기 위해 절차를 알아보던 코트니 씨는 2020년이 돼서야 고용주의 거짓말을 알게 됐다. 업주가 매달 월급에서 국민연금을 명목으로 떼어갔는데도, 미납액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다. 알고 보니 고용주는 코트니 씨의 월급 일부를 빼돌려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어떻게 된 건지 묻자 고용주는 코트니 씨를 불법 체류자로 몰고 갔다고 한다. 코트니 씨는 미등록 이주 노동자가 아닌 비전문취업(E-9) 비자로 정식 입국한 외국인 근로자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사장님(이) ‘여기 왜 있어, 너 illegal(불법적인) 사람 아니야?’ (하면서) laugh (웃었다). 나 불법 아니야. 비자 있어요(라고 항변했다)”고 했다.
결국 코트니 씨는 지역 이주노동센터의 도움으로 고용주에게 소송을 제기했고 2021년 인천지방법원은 ‘고용주가 코트니 씨에게 746만6040원(국민연금 미납액)을 돌려줘야 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2년에 가까운 싸움 끝에 코트니 씨 손에 남은 건 받지 못한 돈이 아닌, 법원의 판결문 1장이 전부였다. 고용주가 미리 자신 명의의 재산을 다 빼돌렸고, 그에게 추징할 수 있는 것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소송이 길어지면서 E-9 비자가 만료됐다는 점이다. 그는 비자를 연장하려 했으나, 정부는 국내에서 근로할 수 없는 기타(G-1) 비자를 내줬다. 당장 필리핀에 있는 반신마비 아버지의 병원비를 벌어야 하는데 정상적으로는 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아직 받지 못한 돈이 수백만 원 남은 코트니 씨는 “G-1 비자를 내준 건 밀린 돈을 받지 말고 나가든가, 미등록 이주 노동자로 일하라는 국가의 통보”라고 말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G-1 비자는 부득이하게 한국에 체류할 때 내주는 임시 비자 성격”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