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선거구 개편을 놓고 뜨겁다. 윤석열 대통령이 중대선거구제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다. 여당은 윤 대통령의 의견에 동의하며 추진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그러나 국회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선거구제 개편보다 비례대표를 확대하는 것으로 현행(소선거구제) 방식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입장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2일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대표성을 좀 더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조선일보 신년 인터뷰에서 “지역 특성에 따라 2명, 3명, 4명을 선출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다”라며 이같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1개의 선구에서 득표를 가장 많이 한 후보가 의원으로 선출되는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다. 중대선거구제는 좀 더 크기가 큰 1개 지역에서 2~4명의 대표를 뽑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A·B·C 지역구가 속한 지역에서 1~3등을 한 후보를 모두 뽑는다.
현행 선거구 제도가 가진 문제점은 승자독식 구조다. 이 때문에 근소한 차이로 이긴 후보가 대표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위가 아닌 후보를 찍은 표는 모두 사표인 셈이다.
거대 당인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선거구제 개편에 대한 논의는 있었지만, 각 정당에 미칠 파급효과가 워낙 커 합의점을 찾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윤 대통령은 현행 소선거구제의 단점에 대해서 “전부 아니면 전무로 가다 보니 선거가 너무 치열해지고 진영이 양극화되고 갈등이 깊어졌다”라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중대선거구제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정치권에서도 여야 모두 중대선거구제 도입에 긍정적 기류가 있는 만큼, 윤 대통령 발언을 계기로 중대선거구제 개편 논의가 본격화할지 주목된다.
선거구제 개편은 정당별 생존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대 사안이다. 따라서국회에서 합의가 필요하다. 국민의힘은 소선거구제 취약점은 있지만, 합의점을 찾는데 상당한 진통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비례대표’ 강화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 위원들과 긴급회의를 마친 뒤 “각 선거제도의 장·단점에 관한 의원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다양한 의견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주 원내대표 주재로 열린 긴급회의에서는 선거구제 개편과 관련해 중점적으로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 다른 선거법 쟁점도 논의된 것으로 전해진다.
주 원내대표는 “전반적으로 소선거구제가 여러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됐다”라며 “가장 큰 문제는 거대양당의 진영 대결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는 점, 득표에 따라 의석수를 가지지 못해 민의를 왜곡한다는 점”이라고 전했다.
다만 “워낙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지역구 사정에 따라 입장이 달라서 의견이 모으는 게 대단히 어렵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라며 “향후 논의에 난항이 예상된다”라고 밝혔다.
정개특위 여당 간사인 이양수 의원도 “각 당내 의원들의 입장이 부딪히는 부분이 많아 결론을 도출하기 쉽지 않다”라며 “예를 들어 더불어민주당도 부산 지역 의원은 빠르게 됐으면 하는 생각이 있을 것이고, 호남 농촌 지역 의원들의 경우 지역 주민들이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중대선거구제 개편’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나타내며 당내 의견 수렴을 통해 공식 입장을 정할 계획이다. 이재명 대표는 4일 최고위원회의 후 진행한 질의응답에서 “지금은 당내 의견 수렴 과정이라 개인적 의견이라도 쉽게 말하는 건 적절치 않을 것 같다”라고 답변을 아꼈다.
이 대표는 ‘중대선거구제에 대해 과거에는 힘을 싣는 입장이었는데 현재는 신중론으로 돌아선 것 아닌가’라는 지적에 “입장이 바뀌었다? 잘 모르겠다. 다당의, 제 3 선택이 가능한 정치시스템이 바람직하다는 말씀드렸고, 그 방식이 중대선거구제여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전 비례대표를 강화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전에 저희가 정치개혁, 정치교체를 말할 때도 비례대표 강화로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라고 했다.
사실 우리나라가 채택한 소선거구제는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은 선진국이 적용하고 있다. 주로 영연방 계열의 국가들이 가장 많이 채택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 영국이며 캐나다 등 45개국이다.
일본은 1928년 중의원 선거부터 1993년 선거까지 정수가 2~5인 중선거구제를 채택했다. 그러나 중선거구제가 계파 갈등과 부정부패의 주범 중 하나로 지목되면서 1996년 중의원 선거부터 소선거구제/비례대표제로 전환되었다.
지방의회 선거의 경우 소선거구와 함께 중선거구제를 적용하고 있는 곳도 있으며, 참의원 선거는 인구가 많은 선거구에 한해 대선거구제가 시행되고 있다. 지방의회의 경우, 시 전체가 하나의 선거구가 돼 수십 명이 같은 선거구에서 한꺼번에 당선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 그러한 이유로 정치 신인이나 시민단체에서 적극 지방의회선거에 나가 당선되기도 한다.
대만은 1948년 첫 선거를 중선거구제를 적용한 이래 2004년 입법원 총선거 때까지 중선거구제를 적용해왔다. 그러나 2000년대 정치개혁의 목적으로 2008년 의원 수를 절반으로 축소함과 동시에 소선거구제로 전환했다. 다만, 대만 원주민 유권자끼리 치르는 대만 원주민 대표 의원을 선출할 때는 아직도 중선거구제를 채택한다.
2018년 지방선거부터 각 향진시구를 단위로 하는 대선거구제로 전환됐다. 인구 과소지역은 1명짜리 소선거구제를 시행하지만, 최대 선거구는 16명까지 뽑는다. 각 정당은 선거구 정수의 절반까지만 후보 공천이 가능해 특정 정당의 의회 독점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소선거구제와 중선거구제를 혼합해서 채택하고 있으나, 중선거구에서 후보 개개인이 아니라 정당에 투표하며, 1위를 기록한 정당이 해당 선거구의 의석을 모두 가져가는 방식이다. 일반적인 중선거구제와는 차이가 있다.
그밖에 아르헨티나는 상원에 한해서 주요 선거구에 중선거구제가 적용되고, 브라질은 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제와 함께 중선거구제가 적용된다. 스웨덴에서는 전체적으론 비례대표제지만, 지역구 의원을 최소 2인에서 최대 44인까지 대선거구제로 선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