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수출 품목 1위인 반도체의 1월 수출액이 전년 대비 ‘반토막’ 나는 등 유례 없는 무역 적자에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산업계에선 세계 경기침체로 인해 수출 주도형인 한국 경제의 시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분석한다.
1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산업계는 올 하반기까지 전례 없는 ‘수출 보릿고개’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한 대기업 임원은 “특정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계 경기침체 장기화에 따른 수요 둔화로 인한 수출 부진인 만큼 뾰족한 대책이 없다”면서 “경비를 줄이고 생산 효율을 높이는 등 내부 요인을 최대한 개선하며 (경기가 회복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지난해 4분기 ‘반도체 쇼크’로 초라한 경영 실적을 거뒀다. 삼성전자 DS(반도체) 부문의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은 전년 4분기보다 97% 급감한 2700억 원을 기록했다. 매출의 95% 이상을 메모리반도체에서 올리는 SK하이닉스는 1조7012억 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부진은 우리나라 수출 지표를 끌어내렸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재정경제금융관 간담회에서 “1월 무역적자는 동절기 에너지 수입 증가 등 계절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가운데 반도체 수출 단가 급락, 코로나19로 인한 중국 경제활동 차질 등 요인이 수지 악화를 가중시켰다”고 밝혔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DDR5 등 차세대 메모리반도체를 중심으로 하반기에 실적이 개선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인위적(직접적) 감산 없이 생산라인 유지보수 강화, 설비 재배치, 미래 선단 노드 전환 등 자연적(간접적) 감산을 통해 미래 수요를 대비한다. SK하이닉스는 투자를 50% 줄이고 반도체 웨이퍼 투입량을 줄여 생산량을 조절하는 직접적 감산 카드를 택했다.
전문가들은 현재보다 수요 회복을 대비한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박재근 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은 “정부가 크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서 “반도체 업계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세액공제 등 지원을 빨리하고 반도체 기반 시설을 갖춘 산업단지를 많이 선정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수출이 다시 살아나려면 반도체뿐만 아니라 석유화학, 철강, 조선 등 대표적인 수출 업종들이 기지개를 켜야 한다. 이들 업종이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코로나19로 봉쇄했던 중국의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이다.
정부는 중국의 리오프닝이 한국 기업의 수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산업계는 즉각적인 효과는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추 부총리는 “향후 무역수지는 여러 변수가 작용하겠지만 1월을 지나면서 계절적 요인이 축소되고 중국의 리오프닝 효과가 시차를 두고 반영되면서 점차 개선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산업계는 중국의 리오프닝 효과가 하반기에 가시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원유 등 업스트림 쪽으로 공급과잉이 지속돼 시황이 올해도 좋지 않다”며 “다만 중국의 리오프닝에 따른 기대감으로 점진적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중국의 리오프닝으로 당장 1분기부터 (실적이)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은 없다”며 “고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특화제품 중심으로 수익 창출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철강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코로나 방역을 완화하면서 경제활동이 재개되고 이에 따른 경기 개선 기대가 되고 있다”며 “현재 글로벌 철강 가격이 점진적으로 상승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하반기부터 중국 정부의 부동산을 포함한 경기 부양 정책이 본격화되기 때문에 글로벌 철강 시황은 점차 상승할 것”이라면서도 “지난해 철강 수요 감소에 대한 기저효과로 올해 글로벌 철강 수요는 소폭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여전히 경기가 어두워서 제품 가격 상승 폭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역대 1월 중 올 1월 가장 많은 수출액을 기록한 자동차 산업마저 올해 상반기부터 불확실성이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 자동차 산업은 환율 효과를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단가가 높은 친환경차와 고급차 판매량이 증가하면서 541억 달러(약 66조5592억 원)어치를 수출했다. 이전 최대치였던 2014년의 484억 달러(약 59조5271억 원) 대비 11.81% 증가한 규모다.
지난해 원·달러 환율이 1400원까지 치솟으면서 완성차 업계는 내수 대신 수출에 주력했다. 전체 생산량 가운데 60%를 밑돌았던 수출 비중이 70% 초반까지 치솟았다. 수출 물량도 많이 증가해 전년 대비 13.3% 증가한 231만2000대가 수출길에 올랐다.
올해 수출 전략은 불확실성이 확대된 가운데 지난해 수준을 밑돌 것으로 관측된다. 주력 수출시장인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을 비롯해 EU 자동차 시장의 위축, 신흥 시장을 겨냥한 일본과 독일 경쟁사의 저가 전략 확대 등이 걸림돌이 될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 관계자는 "지난해 우호적이었던 환율 환경이 올해 수출 시장의 불확실성을 확대하고 있다"며 "수출 주력모델이 노후화 초기 단계에 진입하는 만큼 지난해 수준의 시장 확대를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완성차 업계는 차량 가격 인상을 비롯해 전기차 판매 확대와 고급 모델 판매량을 늘리는 전략으로 수익성 방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