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업계에 CES(세계가전전시회)가 있다면, 소비업계에는 슈퍼볼 광고가 있습니다. 12일(현지시간) 열린 슈퍼볼은 역사상 3번째로 많이 본 TV쇼 기록을 세웠습니다. 약 1억1300만 명이 경기를 시청하고 5년 만에 무대에 복귀한 리애나의 하프타임쇼 공연도 평균 1억1870만 명이 관람했습니다.
광고 단가는 30초에 700만 달러(약 89억 원)에 달합니다. 1초에 약 3억 원인 셈입니다. 주요 기업들은 슈퍼볼에 딱 한 번 상영하기 위해 새로 광고를 만드는데요. 이를 위한 광고 단가 역시 상상을 초월합니다.
광고는 나아가 최근의 세계 동향까지 기민하게 반영하는데요. 올해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커진 경제적 불확실성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을 반영해 가벼운 광고가 주를 이뤘습니다.
찰스 테일러 미국 빌라노바 대학 마케팅 교수는 AP통신과 인터뷰에서 “올해 광고는 가벼운 분위기로 제작됐으며 재미있고 즐거운 느낌을 주는 데 집중했다”며 “대부분 A급 유명인사와 유머를 결합하는 공식을 따랐고, 일부는 과거에 대한 향수나 음악을 사용해 좋은 느낌을 주려 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예컨대 한국 자동차 기업 기아는 ‘빙키 아빠’라는 제목의 광고를 제작했습니다. 광고는 가족 휴가 중 아이의 공갈 젖꼭지 ‘빙키’를 집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은 아빠가 빙키를 되찾으러 가는 험난한 여정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했죠.
올해는 불경기에도 실적을 유지한 주류·음료, 스낵 등 필수소비재 기업이 광고판을 장식했습니다. 실적 둔화로 슈퍼볼 광고를 포기한 현대자동차, 도요타, BMW 등 자동차 기업의 자리를 차지한 건데요. 특히 주류 기업들은 버드와이저를 대표 품목으로 하는 맥주 회사 안호이저부시(Anheuser-Busch)가 30년 이상 지속해 온 슈퍼볼 주류 광고 독점 계약을 포기해 간만에 슈퍼볼 광고판에 진출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중에서도 하이네켄(Heineken)의 미국 내 최초 무알코올 맥주 광고에 이목이 쏠렸는데요. 하이네켄은 한국 기준 15일 개봉하는 마블(Marvel) 영화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의 ‘앤트맨’ 폴 러드를 주인공을 세웠습니다. 광고는 ‘세상을 구하기 전에 마셔도 됩니다(Now you can, Before saving the day)’라는 메시지와 함께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무알코올 맥주의 장점을 강조합니다.
이는 무알코올 음료 카테고리의 전 세계적으로 빠른 성장세를 반영합니다. 글로벌 음료 데이터 회사 IWSR에 따르면, 2022년 12월 기준 무알코올 또는 저알코올 제품군의 시장 가치는 2022년 110억 달러(약 13조9000억 원)에 달합니다. 2018년 80억 달러(약 10조1400억 원)에서 약 37% 성장한 건데요. IWSR은 이러한 성장세가 2025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며 그 이유로 “건강과 웰빙 중심 소비가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케이힐 하이네켄 미국 CMO는 이번 슈퍼볼 광고에 대해 “당신이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하이네켄이라는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이라며 “기업 펀더멘탈에 좋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올해 슈퍼볼 광고의 또 다른 특징은 코인 플랫폼 광고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거금을 들인 가상자산 플랫폼 업체 광고가 슈퍼볼을 장악했죠.
FTX와 코인베이스, 크립토 닷컴등 글로벌 코인거래소 세 곳은 슈퍼볼 광고에만 5400만 달러(약 678억 원)를 지출했는데요. 2022년 슈퍼볼에는 ‘크립토 볼(Crypto Bowl)’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특히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는 슈퍼볼 광고에 검은 화면을 떠다니는 QR코드만 내보내는 과감한 광고 전략으로 슈퍼볼 사상 가장 성공적인 광고로 화제를 모았죠.
하지만 지난해 11월 FTX가 파산 보호를 신청하고 암호화폐 가격이 폭락하자, 가상화폐 업체들은 허리띠를 졸라맸습니다. 이번 슈퍼볼을 중계한 폭스 방송은 암호화폐 플랫폼 3곳과 광고 계약을 논의했으나, FTX 사태 이후 해당 업체가 모두 계약을 철회했다고 밝혔죠. 당시 슈퍼볼을 장악한 가상화폐 광고에 미국 상원은 “투자자에게 잠재적 위험을 설명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는데요. FTX 사태로 올해 슈퍼볼 광고가 전멸한 상황을 두고 상원의 경고가 현실이 됐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슈퍼볼 광고는 그 자체가 콘텐츠입니다. 슈퍼볼 직후 광고 비평·분석 기사가 쏟아지고, 흥미로운 광고에는 유튜브 리액션 영상도 등장하죠. 한편으로는 시청자에게 익숙할 만한 콘텐츠를 활용한 광고도 등장했습니다. AP통신은 “많은 마케터들이 인기 있는 TV와 영화 자산을 활용하려 했다”고 소개했는데요. 일본 온라인 쇼핑몰 라쿠텐은 1995년 개봉한 미국 로맨틱 코미디 영화 ‘클루리스’를 패러디했습니다. 미국 스낵 브랜드 팝코너스는 2008년 미국 범죄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장면을 재현했죠.
세계 최대 OTT 플랫폼 넷플릭스도 슈퍼볼 광고에 뛰어들었습니다. 넷플릭스는 자동차 제조 기업 GM, 맥주 기업 미켈롭 울트라와 협업한 광고를 선보였습니다. GM과 협업한 광고에서 미국 코미디언 윌 페럴은 GM전기차를 타고 넷플릭스 자체 제작 드라마 ‘오징어 게임’, ‘브리저튼’ 등의 장면을 1분간 누빕니다. 미켈롭 울트라와의 광고에서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다큐와 미켈롭 울트라의 맥주를 함께 광고하죠. 광고 방영 후에는 광고에 활용된 넷플릭스 영화·드라마 목록을 묻는 글이 인터넷에 올라오는 등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에 대해 데렉 루커 미국 켈로그 경영대학원 교수는 “기업들이 최대한 큰 효과를 얻기 위해 기억에 남는 광고를 만들고자 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