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부커상 후보 ‘고래’ 천명관 “늦게 당도한 운명…그게 인생”

입력 2023-03-16 15:06수정 2023-03-17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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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 작가)
‘고래’의 천명관 작가를 만났다. 15일 문학계 최고 권위로 손꼽히는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롱리스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청한 만남이다. 16일 일산에서 커피 한 잔을 두고 마주한 그는 19년 전 쓴 작품이 뒤늦게 해외에서 주목을 받는 상황을 두고 “모든 것이 너무 늦게 당도한 인생 같다”고 말하며 덤덤하게 웃었다.

천 작가의 창작 세계는 영화계에서부터 시작했다. 30대 초반에 충무로에 발을 들였고 10년간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내 역량이 부족했을 수 있다. 다만 학벌도 없었고, 나이도 많았고, 인맥도 없었다. 당시만 해도 남성성이 강한 문화가 영화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난히 어려 보이는 외모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다.”고 했다.

“할 수 있는 건 쓰는 것뿐이라 주야장천 쓰기만 했다”고 돌이킨 시절, 세간에 알려진 공동집필작 '총잡이'(1995)와 제작사발 기획작 '북경반점'(1999)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단독 창작(오리지널) 시나리오 10편을 완성하는 동안 영화로 만들어진 건 장동홍 감독의 ‘이웃집 남자’(2009) 정도였다고 한다. 40대가 됐을 때, 천 작가는 감독 데뷔 계획을 접고 문단으로 옮겨간다.

▲'고래' 책표지 (교보문고)

2004년 출간된 ‘고래’는 당시의 작심으로 완성된 장편 소설이다. 이 작품이 제10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고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어려웠던 경제 사정도 차츰 나아졌다. “나를 구원해준 작품이다. 상금, 인세, 판권 판매 등으로 경제적 파산 상태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천 작가는 ‘고래’의 시작을 “황량한 벌판에 놓인 벽돌공장에서 혼자 살아가는 몸무게 120kg의 어마어마한 덩치를 지닌 여자를 떠올리면서부터”라고 기억했다. 그간 영화 시나리오로 구상해 놓은 내용이 워낙 많아, 금세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낼 수 있었다.

거구로 태어난 주인공의 이름은 춘희. 그를 낳은 건 시골 오지에서 태어나 소도시의 사업가로 성공해 영화관을 세우기에 이르는 여인 금복이다. ‘고래’는 이들을 통해 모든 것이 채 개발되지 않았던 1900년대 중반 어느 즈음에 있었을 법한 역동적인 경험을 묘사한다.

‘고래’의 특징은 때로 징그럽게 느껴질 정도로 생동감 있는 문장이다. 금복이 난생처음 바다의 고래를 목격하는 장면은 영상을 글로 옮긴 듯 또렷한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천 작가는 이 같은 색채가 “명사와 동사로 소설을 쓰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했다. 영상의 근간을 이루는 ‘움직임’을 묘사하는 글을 주로 써왔기에, 통상적인 한국 문학이 형용사와 부사를 활용해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것과는 달리 명사와 동사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그의 작품 세계는 영화와는 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 천 작가는 지난해 배우 정우가 출연한 누아르물 ‘뜨거운 피’로 감독 데뷔했다. ‘고래’ 이후로도 소설 ‘고령화 가족’, ‘나의 삼촌 브루스 리’,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등의 소설을 집필한 뒤에 찾아온 기회이자, 충무로를 떠난 지 15년여 만의 일이다.

다만 본인이 쓴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건 아니다. 평생 자기 글을 쓴 사람이 다른 사람의 원작을 각색해 연출한 데 관한 심경이 오묘했던지, 지난해 3월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뜨거운 피’ 기자회견에 참석한 그는 “세상 일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말했다.

그의 다음 프로젝트는 자신의 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계다’를 영화화하는 것이다. “남자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허세 넘치는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블랙코미디가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출간한지 19년이 흐른 뒤에 부커상 후보에 오른 소설, 영화계를 떠난지 15년여만에 연출하게 된 영화... 이같은 경험을 두고 천 작가는 "모든 것이 늦게 당도한 인생"이라고 표현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기어코 어느 지점에 당도하고야 마는 운명일지 모른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먹고 살아야 하니까, 앞으로도 또 작업을 해나갈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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