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민] 국가의 권위, 역량, 정당성

입력 2023-03-2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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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진 미국 럿거스 뉴저지주립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믿기지 않는 정치경제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나라가 부도나던 1997년 12월이 그럴 것이고 대통령 탄핵주문을 내리던 2017년 3월도 그러할 것이다. 가장 최근에는 우리 역사의 아픈 역린을 건드리는, 일제 강제동원 제3자 배상안도 그러한 역사적 사건이 될지 모른다.

개발협력 분야에는 취약국이라는 개념이 있다. 서구 선진국과 상이한 정치경제 시스템을 가진 개도국이 주로 해당되는데, 국가별로 이상적인 제도(institution)가 다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비판적 시각으로 봐야 하는 말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기능에 보편성이 있다면 무엇이 국가를 취약하게 만드는지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광복 후 국가 취약성을 극복한 과정

국가의 취약성은 국가가 세 가지 핵심적인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즉 국가는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위를 통해 안팎으로 국민의 안전를 보장하고(권위), 효율적인 정부 기능을 수행하며(역량), 정권의 정당성(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 요소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어느 부분이 더 부족한지에 따라 국가별로 취약성의 특성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무정부상태인 소말리아는 정부가 사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권위가 부족하여 국가 기능이 마비된 것이다. 군부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유혈탄압을 자행하는 미얀마, 공포정치를 펼치는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은 정권의 정당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경우다. 이러한 취약국의 국가재건 사업 시 외국 원조기관은 정부가 국민에 대한 기초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량을 키우고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간접적인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 후 우리나라도 취약국이었다. 우리나라의 국가재건 과정은 위의 세 가지 요소가 균형있게 동시에 달성되었다기보다는 권위-역량-정당성의 순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해방 및 한국전쟁 직후는 국가 권위를 세우는 것이 우선시되었다. 1950~1960년대는 정세불안으로 대규모 경찰 및 군대를 유지해야 했고, 미국 군대가 경계지역에 대한 민간질서 유지를 맡았다. 정당성 측면에서는 미군정이 일제시대 관리 등 친일파를 등용하여 정당성을 손상시켰다. 이승만 시대에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정부 기능 측면에서는 적산불하와 농지개혁, 미국원조 등을 통해 전쟁으로 무너진 경제를 재건하였다.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의 황금기였던 1960~1980년대에 박정희 정권은 기술관료제를 활용하여 강력한 산업정책을 펼쳤고 정부 역량이 강화되었다. 한편 국가안보 및 경제성장 우선의 논리는 군부 독재를 정당화 하는데 사용되었다. 그후 1992년 김영삼 정권부터 민주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보듯 우리나라는 국가안보와 경제성장이 ‘국익’과 동일시돼 왔다. 따라서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구성원이 해결책 도출에 참여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냄으로써 사회통합으로 나아가는 절차적 정당성을 희생시켜 온 부분이 있다. 이는 사회적 정의 실현과 국민통합 측면에서 후대에 큰 과제를 안겼다. 한일 청구권 협정도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하에서 인권이 유린되고 고통받았던 피해자들의 시각에서 정의를 세우는 방향보다는 경제발전을 위해 자본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접근한 측면이 있다. 이렇게 들어온 외국자본은 정경유착을 통해 대기업에 특혜로 돌아갔고 정작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등 직접적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의 노력은 부족했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보수정권은 이러한 과거의 미흡함을 바로잡고 되돌리기보다는 경제협력 우선이나 미국의 이해를 따르는 논리를 되풀이해왔다. 즉 일본과의 무역과 경제협력을 우선시해야 한다거나,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패권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압력에 따른다거나, 국내외 정치역학으로 인해 피해자의 이해와 희생을 강요하는 상황이다. 한일, 한미 정상회담 전에 매듭지어야 해서, 혹은 최첨단 반도체 사업을 육성하는 데 일본과 미국과의 협력이 중요해서와 같이 경제논리가 사회정의보다 앞선 것이다.

정책결정에서 이기는 자와 지는 자

이러한 정책결정에는 반드시 이기는 자와 지는 자가 있는데, 이기는 자는 한일관계 개선과 경제협력의 핵심 수혜자(대기업 등)나 미래청년기금의 수혜자(젊은 유학생)요, 지는 자는 바로 일본의 사죄와 배상이 아닌 한국 기업에 의한 제3자 변재를 강요받는 고령의 피해자들이다. 왜 피해자들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수혜를 받는지에 대한 답변은 정부가 해줄 것인가.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양보해야 하는 당위와 긴급성을 납득할 수 없는 국민들이 민족 자긍심에 입은 상처도 비용으로 수치화하자면 상당할 것이다. 이러한 결정을 이끈 가장 중요한 배경이 무엇일지 어떻게든 이해해보고자 하다 보면 인지 부조화가 생길 수도 있다.

어쩌면 진정한 이유는 그 모든 것도 아닌 지도자의 개인적 신념과 의지일 수 있다. “지지율이 떨어져도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대승적으로.” 이는 검사 출신 대통령이 대법원 판결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피해자를 비롯한 대다수 국민의 뜻에 반한다 해도, 혜안을 가지고 지도력을 발휘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여기서 생길 수 있는 논리적 착오는 뉴욕대 경제학자 윌리엄 이스털리가 ‘전문가의 독재(The Tyranny of Experts)’라는 책에서 밝힌 바 있다. 우리는 자비로운 독재자의 이야기에 빠져들지만 독재자가 성장을 촉진시킨다는 어떠한 이론도 경험적 증거도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독재와 성장은 인과가 아니며, 독재정권하 성장의 편차가 민주정권하보다 훨씬 크다. 즉 우리가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정의 실현 하에, 산업화와 민주주의가 균형을 이루는 발전을 추구했다면 지금 더 눈부신 현실에서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영웅 개인보다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이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 최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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