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연장 골자로 한 연금개혁안 자동 통과
정국 운영 가시밭길 예고
법안은 물론 정부 정당성 약화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이날 프랑스 하원에서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 불신임안이 9표 차로 부결됐다. 하원 전체 의석 577석 가운데 278명 찬성으로 과반을 넘기지 못했다. 현재 4석이 공석이라 불신임안을 가결하려면 의원 287명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극우 성향의 국민연합(RN)이 별도로 발의한 불신임안도 표결 결과 94명의 찬성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내각 불신임안이 하원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보른 총리는 사퇴 위기를 넘겼다. 야당은 지난주 보른 총리가 하원 표결을 생략하고 헌법 제49조3항을 발동, 연금개혁안을 강행하자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헌법 49조3항에 따라 정부는 긴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했을 때 국무회의를 통과한 법안을 총리의 책임 아래 의회 투표 없이 통과시킬 수 있다.
마크롱 정부는 현 제도를 계속 운영하면 재정 고갈을 막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세금을 투입하거나 연금 수령액을 깎는 대신 정년을 2030년까지 62세에서 64세로 점진적으로 연장해 해결하자는 입장이다. 또 연금을 100% 수령하기 위한 기여 기간을 42년에서 43년으로 1년 늘리고, 적용 시점을 2035년에서 2027년으로 앞당기자는 내용도 개혁안에 포함했다.
내각과 법안이 살아남았지만 향후 정국 운영은 가시밭길이 예고됐다. 불신임안이 겨우 9표 차로 부결된 만큼 하원 내 반대세력을 설득하는 일이 과제로 남았다. 이민, 투자, 우크라이나 지원, 기후 등 추진 법안마다 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파리정치대학의 필립 모로 교수는 “마크롱의 권한이 사실상 끝났다고 생각한다”며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정년 혹은 연금개혁이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라고 지적했다. 마크롱이 의회 동의 절차를 건너뛰면서 법안은 물론 정부의 정당성을 약화시켰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시민의 저항도 거세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70%가 정년 연장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위가 멈출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노조는 23일 대규모 파업과 집회를 예고한 상태다.
우편 서비스 업무를 하다가 퇴직한 한 여성은 타임과 인터뷰에서 “지난해 결선 투표에서 마크롱을 찍었지만, 오늘 선거가 치러진다면 불행하게도 극우 성향의 마린 르펜이 승리할 수 있다”며 “마크롱이 대화와 협의 없이 일을 처리한 것이 프랑스인들을 분노하게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