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기업 의견 대변해 협상 나서야”
“메모리 초격차 유지하고 시스템 반도체 키워야”
“메모리 반도체 하반기부터 업황 턴어라운드”
미국과 중국, 유럽의 반도체 패권 전쟁이 치열한 가운데, 국내 반도체 업계가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21일(현지시간) 미국 상무부가 반도체법(CHIPS Act)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 세부 규정을 발표하자.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는 일단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는 반응이 나왔다. 당초 우려한 중국 공장 내 기술 발전(업그레이드)에 대한 규제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반도체 공장 투자를 준비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투자 보조금을 받게 되면 이후 10년 동안 중국에서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을 5% 이상 확장할 수 없게 된다. 미국 내 반도체 공장 증설을 준비 중인 삼성전자로서는 보조금 신청 여부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상무부는 지난달 28일에도 일정 규모 이상의 보조금을 받을 경우 △초과 이익 일부를 공유하고 △지원금을 배당금 지급이나 자사주 매입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미국 정부의 반도체 시설에 대한 접근을 허용하도록 하는 등의 조건을 제시했다.
미국과 줄다리기를 하는 중국은 막강한 반도체 시장을 무기 삼아 우리나라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반도체 수출 물량 중 중국 비중은 40.3%다. 우리나라 반도체는 그야말로 미국과 중국 두 고래 싸움에 끼인 형국이다.
여기에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전망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는 최근 “구글·마이크로소프트(MS)·메타·아마존웹서비스(AWS) 등 북미 4대 빅테크 기업이 일제히 올해 서버 구매 물량을 축소했으며, 향후 추가 하향 조정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미·중 정부가 국내 기업에 투자와 협력을 압박하고 있고 업황 마저 잿빛인 가운데, 정작 한국에서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개별 기업만 등장할 뿐 ‘정부 역할’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본지는 22일 산업계와 학계, 증권사 반도체 전문가 6명에게 반도체 패권 전쟁과 경기 침체 속에서 국내 기업·정부가 어떤 해법을 내놔야 하는지 들어봤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한국 반도체 산업이 한결같이 ‘진퇴양난’ 처지라고 평가했다. 반도체 패권의 우위는 미국이 점하고 있다는 데 대부분 의견을 같이했다.
서승연 신영증권 연구원은 “최근 미국이 중국을 제재하는 데 중국이 이에 맞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반도체 장비 메인 기업이 대부분 미국과 유럽에 분포돼있기 때문”이라며 “중국이 장비를 자체개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패권은 당분간 미국이 쥐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짚었다.
문제는 반도체 주요 기술과 장비가 미국에 종속된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의 주요 생산공장이 중국에도 있다는 점이다. 중국 생산공장에 장비를 들이지 못하면 생산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중국 다롄에 있는 인텔 생산공장을 인수했는데, 이 때문에 큰 피해가 우려된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를 지금보다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르면 4월 새 수출 통제 방안이 도입되면,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 미국의 특별 허가를 받아야 하는 장비의 수가 지금보다 2배로 늘 수 있다. 미국은 이같은 내용을 반도체 장비 강국인 일본, 네덜란드 정부와 조율할 계획이다.
주대영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 연구위원은 “길게 보면 중국 반도체 기업의 성장을 막아 이득이 될 수 있겠지만, 단기적으로는 우리에게 피해가 올 수 있다”며 “중국 내 D램 생산을 위해 장비가 들어가야 하는데, 중국에 이를 반입하지 못해 상산 차질이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우려했다.
미국과 중국의 줄다리기 속에서 국내 기업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사실상 없다. 중국은 수요 측면에서 중요한 시장이지만, 우리 기업들의 반도체 핵심기술 대부분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어서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이창한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근부회장은 “기본적으로 미국이 기술을 제공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미국과 자유롭게 협력하는 분위기를 가져가야 하는데, 중국 시장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사무국장도 “일단 미국은 기업에 이익이 있으면 가야된다”면서도 “다만, 중국은 우리 마음대로 못 간다. 미국에 장비가 다 종속돼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선 정부가 기업을 대변해 중간자 역할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창한 상근부회장은 “정부와 기업은 미국을 충분히 설득해서 중국 내 공장이 잘 가동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중국으로부터 우리 기업의 지식재산권을 잘 보호해줘야 하고, 미국으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조건이 까다로우므로 여기에도 협상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주대영 연구위원은 “반도체 지원법 세부조항에 포괄적인 내용이 많아 오해도 있다. 가령, 해외 투자 제한 조항은 미국 법인에 적용되는 것인지, 전 삼성전자 법인에 적용되는 것인지 불분명한데 이런 부분에서 정부가 선을 그어줄 필요가 있다”며 “더군다나 미국 산업 정책 담당 부서가 모호해진 상황에서 협상의 역할이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문가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한 전략도 제시했다. 이창한 상근부회장은 “우리나라는 메모리 부문이 강하다 보니 집중적으로 기술 및 제품 개발을 통해서 경쟁력을 확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지금까지 우리 기업이 못했던 시스템 반도체나 파운드리 같은 곳에 힘을 쏟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양재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법인세 감면이나 국내 투자를 유도하거나, 중국과의 관계 악화에 대비해 중국에 의존 중인 소재들을 선제적으로 국산화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답했다.
서승연 연구원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의 점유율이나 기술력은 탑클래스다. 연구·개발(R&D)을 지속하다 보면 메모리에서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며 “비메모리, 파운드리 같은 경우도 첨단공정을 7nm(나노미터) 이하로 할 수 있는 기업은 삼성과 TSMC밖에 없으므로 계속해서 투자와 R&D를 하다 보면 두드러질 수 있다”고 했다.
한편, 반도체 수급 불균형과 이에 따른 업황 불황에 대해 연구원들은 긍정적인 전망을 내놨다. 안기현 사무국장은 “전문가들은 3~4분기면 다시 업황이 턴어라운드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감산에 따른 공급 감소에 이어 챗GPT 등 영향으로 수요가 또 늘어날 것이라고 본다”라고 내다봤다.
김양재 연구원은 “올해 연말까지도 재고가 소진되기 어려워 보인다”면서도 “그나마 긍정적인 건 메모리 재고는 많이 떨어져 하반기에 수요 증가세가 보일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노근창 연구원은 “반도체 수급 불균형은 최소한 올해 2분기까지는 갈 것 같고, 2분기 말까지는 공급과잉에 따른 재고조정과 가격하락이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