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위험요인에 처음 노출된 뒤 실제 자살에 이르기까지 평균적으로 10년이 걸린다. 이런 점에서 자살을 줄이려면 고위험군 조기 발견과 적절한 개입이 필수적이다. 근본적으론 자살 위험요인 노출을 최소화해야 한다. 취약계층에 대한 취업·소득 지원, 폐업·실직 시 사회안전망 강화, 자살 유발정보 차단 등 다양한 정책이 적절히 조합돼야 할 것이다. 보건복지부가 14일 발표한 ‘제5차 자살예방 기본계획(2023~2027년)’에도 대체로 이런 정책들이 담겼다.
한국의 자살률(인구 10만 명당)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지만, 고점 대비로는 많이 줄었다. 그간 정부의 정책적 대응이 완벽하진 않았더라도 나름의 효과는 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개선할 과제도 많다. 40대 이상 자살률의 꾸준한 감소세에도 30대 이하 자살률은 2017년 이후 증가세다. 이 때문에 전 연령대 자살률은 20명대 중반에 정체돼 있다. 그간 효과를 본 정책들을 확대하면서 30대 이하의 공통된 위험요인을 추가로 찾아 제거하는 게 필요하다. 상담·치료를 확대하고, 정신건강검진 주기를 단축하는 데 그쳐선 안 된다.
관건은 문제를 어디서 찾느냐다. 엉뚱하게도 ‘나치 독일’에 참고사례가 있다. 심리학자 프롬(Erich Seligmann Fromm)은 독일 태생의 유대인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유대인에 대한 나치 정권의 위협이 가시화하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에서 독일인들이 스스로 나치즘에 종속된 배경을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요약하자면, 종교개혁 이전 그리고 계급사회에서 피지배계층은 자유를 박탈당한 대가로 ‘소속감’을 가졌다. 교회, 국가라는 거대한 공동체에서 자아를 상실하고 도구가 됐다. 그런데, 교회와 계급이 붕괴하고 자본주의가 확산하면서 이들은 소속과 역할이 사라졌다. 스스로 생존해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에서 과거 피지배계층은 고립감,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그러던 중 나치즘을 앞세운 히틀러가 등장했다. 피학에 길들어진 이들에게 가학적 지도자는 가뭄의 비였다.
사회가 정답을 정해주는 시대에서 ‘정답’이 사라졌을 때, 정답대로 살기를 강요받았던 이들이 직면하는 현실은 ‘자유’가 아닌 ‘혼란’이다. 히틀러는 이 점을 파고든 것이다.
한국의 청년들은 태어나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교로부터, 가정으로부터, 사회으로부터 끊임없이 정답을 강요받는다. 공부를 못하면 특성화고를 졸업해 조기 취업하고, 공부를 잘하면 의과대학이나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는 게 답이다. 중소기업, 비정규직 취업은 실패한 인생이며, 결혼하려면 자가는 필수다. 일종의 사회적 가스라이팅이다. 막상 사회에 나오면 답이 없다. 강요받은 답이 틀렸단 건 알았는데 누구도 다른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누군가는 정답대로 살았는데 불행하다. 이때 청년들이 마주하는 건 자유가 아닌 혼란일 거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스스로 답을 찾는 기간이 길어지면 청년들은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정신건강 문제와 상사·동료관계, 업무부담 등이다. 이들은 청년층의 주된 자살 위험요인이다. 독일인들에겐 나치즘이란 일종의 마약이 있었지만, 마약의 끝은 파멸이다. 따라서 청년들의 자살을 예방하려면 애초에 정답을 강요하는 사회적 가스라이팅을 중단해야 한다. 이미 피학에 익숙해진 청년들에겐 여러 선택지를 줘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
풍토, 문화를 정책적으론 바꾸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노력해야 한다. 어렵겠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