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김지연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장은 서울 종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경복궁 광화문 월대 발굴성과 및 복원계획 공개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월대는 그간 조선시대 기록이나 사진 자료를 통해서만 알려져 있던 곳이었다”면서 “조선시대 법궁으로서 경복궁의 상징성을 더욱 빛나게 해줄 곳”이라고 이번 발굴조사의 의미를 짚었다.
광화문 월대의 규모는 남북 길이 48.7m, 동서 너비 29.7m다. 좌우로 신하가 다니는 길이 나 있고 정중앙에는 임금이 오가는 공간이었던 7m가량의 어도지가 존재하는 형태다. 양쪽으로 화려한 장식이 깃든 난간석이 설치돼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대의 백성들이 임금이 경복궁 안에서 광화문 바깥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던 너른 길이자, 무과 시험을 치르거나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등의 중요 행사에서 일종의 무대 기능으로 활용된 공간으로 파악된다.
월대의 존재가 발견된 건 2010년 광화문 복원 당시다. 이날 자리에 함께한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는 “당시 약 8m 정도의 구간을 확인했고 약 12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민들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사직로를 우회시키는 방법으로 월대 발굴조사를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865년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 작성한 경복궁 영건일기에 ‘1866년 3월 3일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축조 시점은 적어도 고종대로 가늠된다.
신 교수는 “(월대) 앞에 해태석과 하마석이 있었다는 건 신하가 거기에서부터 말에 내려서 궁궐로 진입해야 했다는 의미”라면서 “광화문으로 가는 전면 진입로이자 왕실 의식이 벌어지는 무대로 사용될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 복합적인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또 “임금이 행차할 때 광화문을 벗어나려면 월대를 통해서 나갈 수밖에 없었고, 그때 백성이 임금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소통 공간 역할을 겸했을 거라고 볼 수 있다”고 전했다.
광화문 월대는 본래 남쪽으로 길게 뻗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대로)까지 50m가량 길게 자리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노면전차를 위한 도로가 깔리는 등의 이유로 난간석이 철거되고 본래 형태가 파괴됐다.
이날 문화재청 관계자는 “1923년 ‘전차가 궁궐 앞으로 지나가면서 난간석도 헐릴 위기’라는 동아일보의 기사가 존재한다”면서 “그 자료를 참조해 1923년경 월대가 훼철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당초 백성들의 통행로보다 다소 높게 지어 올려진 월대가 땅 속에 완전히 묻히게 된 배경이다.
문화재청은 복원 과정에서 당대의 월대 높이를 그대로 구현하되, 이미 높아진 주변 도로 사이에 자연스러운 경사로를 형성해 월대의 원형을 보존하면서도 일반 관람을 가능케 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광화문 월대는 땅속에 묻혀있는 양호한 상태의 기단석을 추려 재사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복원을 거쳐 오는 10월 일반에 공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