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서 급발진 제조사 책임 인정된 사례 없어…"신중한 논의 필요"
최근 자동차 급발진 의심 사고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국회에서는 제조업자인 자동차 회사에 입증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의 개정안이 줄줄이 발의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제조사에 전적으로 입증 책임을 지우는 내용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측면에서 신중히 검토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23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허영 의원은 11일 급발진 사고의 제조사 입증 책임을 강화하는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허 의원의 입법안은 현행법에 따른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법원의 자료제출명령제도를 도입해 제조업자가 영업 비밀이라 하더라도 결함과 손해의 증명 또는 손해액 산정에 반드시 필요한 경우 자료 제출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아울러 제조물이 자동차관리법의 적용을 받는 자동차인 경우, 그 결함 및 손해의 입증책임을 자동차 제조업자가 지도록 하는 특례를 둠으로써 피해자의 입증 부담을 완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같은 당 한준호 의원도 18일 자동차 급발진 의심 사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한준호 의원안은 자동차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하면 성능시험대행자로 하여금 사고 원인을 의무적으로 조사하게 하고, 사고가 의심되는 경우엔 자동차제작자가 사고에 대한 입증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면 자동차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국회에는 이미 국민의힘 정우택 의원과 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급발진 관련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이 계류돼 있다. 정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피해자가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해 손해가 발생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영상자료, 기록물 등을 법원에 제출하는 경우에는 제조업자 등이 해당 제조물에 결함이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박 의원의 입법안도 제조업자가 해당 제조물을 공급할 당시 결함이 없었고 그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하여 손해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도록 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자동차 급발진은 통상 차량이 정지 또는 매우 낮은 출발 속도에서 운전자가 의도하지 않은 높은 출력이 굉음과 함께 나타나면서 차량을 제어할 수 없는 현상을 의미한다. 앞서 지난해 12월 6일 강릉시에서는 60대 A 씨가 손자를 태우고 운전한 스포츠유틸리티차(SUV)의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해 12살 손자가 숨졌다. 이후 A 씨 가족이 2월 국회 국민동의 청원에 올린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결함 원인 입증 책임 전환 청원' 글에 5만 명 이상이 동의함에 따라 정무위원회에 회부됐다.
다만, 현재 국내에서 차량 급발진에 대한 제조사의 책임이 인정된 사례는 전무하다. 민주당 허영 의원이 한국교통안전공단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13년간 급발진 의심 사고가 766건 발생했으나 급발진으로 인정된 사례는 하나도 없었다.
같은 당 강병원 의원이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02년 7월 제조물 책임법 시행 이후 2019년 5월까지 1심 판결이 나온 급발진 의심 소송 28건 가운데 자동차 제조사의 책임이 일부라도 인정된 사례는 시프트 록 장치 미설치를 설계상 결함으로 본 2002년 12월 판결이 유일하다. 하지만, 대법원에서는 자동차 설계상 결함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쪽으로 판결이 뒤집혔다.
국회입법조사처가 12일 발간한 '자동차 급발진 의심 사고의 입증책임 관련 쟁점과 향후 개선 방향'에 따르면, 작년 9월 유럽 집행위원회는 회원국에게 '피해자의 요청에 따라 손해배상의 타당성을 입증할 만한 사실과 증거를 공개하도록 법원이 명령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제조업자 등이 이를 공개하지 않는 경우에는 인과관계를 추정하도록 하는 내용의 '제조물책임지침 개정안'을 채택했다.
다만, 증거공개 요청권을 통해 제조업자에게 입증 책임을 지우는 것이 합리적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증거공개 요청권은 제조업자에게 편중된 정보를 획득해 손해에 대한 적용 등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피해자가 소송에 필요한 입증자료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증거공개 요청권을 가능하게 하는 경우, 제조업자의 영업비밀과 관련된 자료보호의 권리와 상충될 수 있다는 점, 제도의 남용으로 인한 사업의 효율적인 운영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 등도 형평성의 측면에서 충분히 고려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회 정무위원회 곽현준 전문위원도 관련 법안 검토보고서에서 "입증 책임의 분배는 원칙적으로 ‘공평의 이념’에 근거해 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피해자의 주장만으로 결함의 부존재 입증 등 소송에 필요한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 제조업자에게 전적으로 입증 책임을 부담하게 하는 것의 합리성에 대한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곽 전문위원은 "외국의 유사 입법례를 살펴보면 원칙적으로는 전통적인 증명 책임 분배 원칙(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자가 증명)을 따른다"면서도 "미국은 판례를 통해 피해자의 입증 책임 완화 법리를 폭넓게 적용해 피해자가 사고 당시 영상기록, 목격자 진술 등의 자료를 제출하면 제조업자가 결함이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 바, 이 법 개정 논의에 시사점이 있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