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이는 커서가 제자리를 맴돌 뿐 글은 쉽게 나아가질 못한다. 공직 때의 직장 사보 편집장 경험이 무색하기만 하다. 10년쯤 전에는 언론에 정기적으로 기고도 했다. 누구에게나 왕년은 있다지만, 경험이 더 쌓인 만큼 글이 편해지지 않는 건 씁쓸하다. 마음을 달래려고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켰다. 커서는 더 오래 깜빡인다.
‘도둑맞은 집중력(Stolen Focus)’의 저자인 영국의 저널리스트 요한 하리는 핸드폰과 컴퓨터 없는 일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접 검증했다. 항복 선언까지는 불과 2주 걸렸다. 미국 10대들의 몰입은 65초, 직장인은 3분에 불과하다니 오래 견딘 셈일까. 핸드폰을 집에 두고 떠났던 출장길의 아득함과 불안감을 떠올려보면 나도 마찬가지다.
예상하듯 진단은 집중력 저하, 파편화된 정보가 범람하는 디지털 환경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테크 기업의 정치경제학과 약탈적 마케팅은 보이지 않게 구축된 컨텍스트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개인 차원을 넘는 사회적 유행병으로 단언하고 시급한 대응을 촉구한다. 책의 부제는 ‘집중력 위기의 시대,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법’이다.
핸드폰 중독의 부작용은 증가하는 피싱사기로 이어진다. 완벽하게 가장된 문자를 받으면 속지 않을 수가 없다. 문자와 카카오톡을 활용한 메신저피싱이 활개를 치는 이유다.
4월 어느 날, 잘 아는 중견기업 회장님에게 문자를 받았다. 캡처된 사진에는 내 카톡 화면이 담겨 있었다. ‘안녕하세요, 중견련 상근부회장 이호준입니다. 미국 출장 중이라 메시지 부탁드립니다.’ 감쪽같다. 답신을 보냈다면 이내 피싱 작업이 진행됐으리라. 지인들의 확인 전화가 쏟아졌다. 대부분 미국 출장이냐고 물었다. ‘위장된 나’를 믿고 송금하려다가 ‘진짜 나’와 연락이 닿아 간신히 피해를 막은 경우도 있었다.
SNS와 메일 계정 비밀번호를 길고 복잡하게 바꿨다. 2단계 인증도 했다. 귀찮기만 하던 보안 절차의 필요성을 절절하게 느꼈다. 삼사일이 지나서야 상황은 겨우 진정됐다. 얼마나 조심성이 없으면 피싱을 당하냐는 쪽이었는데, 겪어보니 자신감은 완전히 무너졌다. 의도치 않게 ‘나’로 말미암아 타인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 스스로 조심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지난 5년간 국내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1조7000억 원에 이른다. 특히 메신저피싱은 지난 해 보이스피싱 전체 건수의 89%를 차지하는데, 그 중 95%는 카카오톡을 활용한 것으로 파악됐다. 정보와 학습, 신뢰와 소통, 일과 여가의 모든 걸 빨아들인 핸드폰의 호출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적 금융범죄의 창궐을 예방할 도리가 있을까.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세상, 고립에 대한 불안은 문자로든 SNS로든 어딘가와 누군가와 연결돼야 한다는 절망적인 필요를 낳았을 것이다. 만나서 대화하기보다 문자가 편해지는 아이러니는 더 서글프다. 식탁에 마주앉아 문자로 대화하는 가족의 이미지는 블랙코미디가 아닌 현실이다.
멀티테스킹이 창의력을 끌어 올린다는 주장도 있다. 내 학창 시절에는 라디오를 켜고 공부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요새 아이들은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고, 문자로 대화를 하면서 게임을 즐긴다. 젊은 천재들이 AI를 만들어내고, 인터넷과 클라우드로 이른바 에브리씽을 연결했다. 목하 첨단 기술의 절정인 ChatGPT는 신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편리한 시절이고, 되돌릴 이유는 없다. 다만 실제와 모상을 구분하기 어려워진 ‘초현실’적인 일상 속에서, 삶의 주도권을 붙들기 위한 조금의 자제와 집중은 보다 균형 잡힌 세상을 만들어 주리라 믿을 뿐이다. 물론 쉽지 않을 터다. 요한 하리는 ‘반란’, 집중력을 되찾기 위한 전쟁이 필요하다고까지 말했다.
핸드는 폰만 잡으라고 있는 게 아니다. 늙은 부모의 등을 긁어드리고, 동네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따스하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며칠 째 읽는 두꺼운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 손은 마침내 조금 쉰다. 빙하기쯤이 지난 먼 미래, 핸드폰을 쥔 사이보그종의 화석으로 발견되면 좀 억울하지 않을까. 깜빡이던 커서가 경쾌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