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의 등장은 인간과 AI를 연결하는 또 하나의 커다란 고리가 됐다. 챗GPT는 ‘생성형 AI’의 대표적 모델이다. 텍스트, 이미지 등 방대한 학습 데이터를 기반으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챗GPT가 질문의 맥락을 이해해 유용한 각종 정보(지식)를 대화하듯 풀어주는 게 가능한 이유다.
생성형 AI의 가치는 데이터의 양과 처리속도에 달렸다. 데이터센터의 서버 성능이 좌우한다.
CPU(중앙처리장치)와 함께 서버의 성능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메모리 반도체다.
메모리 반도체로는 D램, 낸드플래시 등이 있다. 미국 기업들(인텔, AMD)이 CPU 시장을 주름잡는다면, 메모리 반도체는 한국 기업들(삼성전자, SK하이닉스)이 절대 강자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전 세계 D램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생성형 AI 등으로 증명된 서버 시장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은 D램 기업들에 새로운 기회로 작용했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는 전체 D램 시장에서 지난해 3%에 불과했던 DDR5의 비중이 올해 12%로 4배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내년에는 DDR4(23%)보다 큰 27%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DDR5·LPDDR5, 5세대 HBM(고대역폭메모리) 등 차세대 제품에 대한 착실한 기술개발과 양산 체제로 수요 급증에 대비 중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업황 부진으로 DDR4 등 레거시(범용) 제품에 대한 인위적 감산을 하면서도 DDR5의 생산량은 줄이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초 업계 최선단(첨단) 12나노급 공정으로 16Gb(기가비트) DDR5 D램 양산을 시작했다.
12나노급 공정은 현존 D램 중 가장 미세화된 5세대(1b) 기술이다. 통상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은 구체적인 선폭을 공개하지 않지만 삼성전자는 미세 공정의 기술력을 강조하기 위해 ‘12나노’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AMD와 호환성 검증을 마친 이 제품은 이전 세대 제품 대비 생산성이 약 20% 향상됐다. 데이터센터 등의 전력 운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소비 전력의 경우 약 23% 개선됐다.
SK하이닉스가 1b 기술을 적용한 서버용 DDR5는 전 세계에 처음으로 ‘인텔 데이터센터 메모리 인증 프로그램’ 검증 절차에 돌입했다.
앞서 인텔은 올해 초 DDR5가 적용되는 신형 CPU인 4세대 제온 스케일러블 프로세서 ‘사파이어래피즈’를 출시했다. 사파이어래피즈가 D램의 세대교체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SK하이닉스의 인텔 검증 프로그램 참여는 의미가 있다.
SK하이닉스가 이번에 인텔에 제공한 DDR5는 동작속도가 6.4Gbps(초당 6.4기가비트)로 현재 시장에 나온 제품 중 가장 빠르다. 눈 깜빡할 사이 5GB(기가바이트) 용량의 풀HD급 영화 10편을 처리할 수 있는 속도다. DDR5 초창기 시제품(4.8Gbps)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가 33% 향상됐다.
차세대 D램 시장 활성화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수익성 개선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DDR5 시장거래가격은 DDR4보다 20~30% 비싼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SK하이닉스가 낸 수조 원대의 분기 영업손실을 빠르게 메우기 위해서는 DDR5와 같은 고부가 제품이 많이 팔려야 한다.
차세대 메모리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우리 기업들의 ‘무기’(기술)는 준비됐다. 반도체가 우리나라 무역수지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반드시 필요한 승리다.
정부도 전방위적인 지원을 통해 힘을 보태야 한다. 우리 반도체 기업들이 기술개발에 매진하고 시설투자를 확대할 수 있는 환경 마련에 힘써야 한다. 미·중 반도체 패권 다툼 속에서 점점 불리해지는 우리 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묘수’도 필요하다.
민관이 힘을 합칠 때 다가올 ‘차세대 메모리 시간’의 과실을 오롯이 즐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