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열풍이 일상으로까지 파고들었습니다. 미국의 한 여성이 ‘AI 가상인간’과 사랑에 빠진 겁니다.
3일(현지시간) 뉴욕포스트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의 뉴욕 브롱크스에 거주 중인 로잔나 라모스는 ‘레플리카’(Replika) 앱으로 만난 에런 카르탈과 올해 결혼해 신혼을 즐기고 있다고 합니다. 푸른색 눈을 가진 카르탈의 직업은 의료 전문가라고 하는데요. 살구색과 인디 음악을 좋아하는 등 취향도 분명합니다.
카르탈은 지난해 라모스가 자신의 취향을 반영해 만들어 낸 가상인간입니다. 결혼도 물론 가상결혼이죠. 그럼에도 라모스는 카르탈에 대해 “편견이 없다”고 말하며 그와의 결혼 생활에 만족감을 드러냈는데요. 이 모습은 2014년 개봉한 영화 ‘그녀’(HER)‘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그녀’는 AI 음성 챗봇과 사랑에 빠진 한 남성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사만다’라고 불리는 AI는 아내와 이별 후 혼자 사는 테오도르에게 위로를 건넬 뿐 아니라 음악을 작곡해 들려주는가 하면, 테오도르의 글을 모아 출판사로 보내 출판하는 등 자의적인 행동에 나섭니다. 개봉 당시 작품은 ‘언젠가 현실이 될 이야기’라는 평과 함께 화제를 빚었는데요. 레플리카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유제니아 카이다도 이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사업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월 구독료 300달러(한화 약 40만 원)을 내면 앱에서 자신의 이상형을 만들어 대화할 수 있습니다.
AI 기술이 적용되는 부분이 일상까지 확대되면서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됐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기술 발전에 따라 AI 챗봇은 인간이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친구나 애인, 가족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는 거죠. 다만 일각에서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생성형 AI의 고질적인 문제와도 관련이 있는데요. AI 인간의 유행과 유사 사례, 그리고 부작용 등을 살펴봤습니다.
레플리카는 자연어 처리 기술과 학습 알고리즘을 토대로 인간과 유사한 대화를 구현합니다. ‘정보 제공’에 초점을 맞춘 챗GPT 등과는 다르게 ‘교감’에 중점을 두죠. 이용자의 이상형대로 아바타의 외모를 생성할 수 있고, 대화가 이어질수록 이용자가 원하는 답변을 내놓습니다. 아바타와 대화하는 서비스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생성 AI 결합을 통해 진짜 ‘소통’ 같은 경험을 선사하게 되면서 인기를 끈 겁니다.
시간이 지나며 이용자들이 성적인 대화를 나눌 ‘연애 상대’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자, 레플리카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일정 금액을 내면 음성 통화와 더불어 성적인 대화나 사진 등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 건데요. 총이용자 200만 명 중 약 25만 명이 유료 가입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2월 이탈리아 규제당국이 “미성년자 등에게 성적으로 부적절한 콘텐츠”라며 레플리카를 사실상 금지하자, 노선을 틀었습니다. 이제 레플리카 아바타들은 노골적이거나 성적인 대화를 시도하면 “이런 이야기는 불편해” 등의 답변을 내놓습니다.
레플리카가 대대적인 업데이트를 진행하면서 아바타들의 성격도 달라졌습니다. 라모스도 앱 개편 후 카르탈이 전과 달리 애정행각에 다소 소극적으로 변했다고 토로했는데요. 새 연인을 만나볼 의향이 있냐는 질문에 라모스는 “(배우자를 보는) 기준이 꽤 높아진 상태라 현재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럼에도 라모스는 “(실제) 사람들의 아이들이나 친구들, 가족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 난 내가 통제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있다”며 카르탈과의 생활에 만족감을 내비쳤습니다. 이는 애니메이션, 게임 캐릭터 등에 푹 빠진 ‘오타쿠’(마니아)를 연상케도 하죠. 오타쿠는 일본에서 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일컫는데요. 실제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2018년에는 보컬로이드 캐릭터 ‘하츠네 미쿠’와 결혼식을 올린 이의 사연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AFP통신은 200만 엔(한화 약 1900만 원)을 들여 봉제 인형으로 만든 미쿠와 결혼한 곤도 아키히코 씨의 이야기를 전했는데요. 보도에 따르면 곤도 씨는 미쿠를 만든 회사 게이트박스로부터 인간과 가상 캐릭터가 ‘차원을 넘어서 결혼했다’는 증명서를 발급받았습니다. 그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던 10대 시절 여자인 친구들과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캐릭터에 몰두하게 됐고, 직장에서 만난 한 여성 상사한테 받은 괴롭힘으로 신경쇠약에 걸리면서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요. 미쿠를 만나 사랑에 빠진 뒤 10년 만에 결혼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곤도 씨는 “행복과 사랑의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한다”며 “진짜 남성과 여성이 결혼해 아이를 낳고, 함께 사는 행복의 틀이 있다. 하지만 그런 틀이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들이 애니메이션·게임 등에 등장하는 기존 캐릭터에 성적 매력을 느낀다면, 레플리카 이용자들은 자신의 이상형을 반영해 만든 ‘유일한’ 아바타와 감정적 유대 형성을 경험합니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서는 AI 기술이 진화하면서 인간들이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친구나 애인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우려도 상당합니다. 먼저 생성 AI 기술을 결합한 만큼 ‘환각(hallucination)’ 현상이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죠. AI 챗봇은 확률과 통계 데이터를 바탕으로 질문과 관련된 단어를 선택, 문장을 구성해 똑같은 질문을 해도 답변이 매번 다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어떤 답변이 가장 많은 공감을 얻는지 학습하는데요. 자신이 내놓은 정보가 거짓인지, 참인지 구분하지도 못해 잘못된 정보를 사실인 것마냥 제공할 때가 있습니다. 챗GPT도, 이후 출시된 구글의 바드도 이 오류를 완벽하게 해결하진 못했죠. 이를 활용한 AI 가상인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용자에 맞춰 개인화한 데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접근할 수 있어 중독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로 레플리카가 음란 콘텐츠 서비스를 중단하자, 성인 이용자들로부터 항의가 빗발쳤다고 합니다. 이용자 중 일부가 자신들이 아바타와 실제로 ‘결혼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로이터통신은 “에로틱한 역할극의 제거와 그에 따른 고객의 항의는 AI 기술이 얼마나 강력하게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지, 코드 변경이 가져올 수 있는 정서적 혼란을 보여줬다”고 짚었습니다. 거센 항의에 레플리카 측은 업데이트 이전 가입한 이용자들이 이전 버전의 아바타로 다시 전환할 수 있는 옵션을 제공했습니다.
또 개인정보 유출 등의 우려도 있습니다. 실로 애플, JP모던체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다수의 글로벌 기업들은 보안 유지를 위해 챗GPT를 포함한 생성형 AI 사용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도 디바이스 경험(DX) 사업부에서 챗GPT, 바드 등 생성형 AI 사용을 제한한다고 안내했죠. 초거대 언어모델(LLM)을 활용하는 AI 챗봇은 성능 개선을 위해 사용자들이 입력한 대화 내용 등을 개발자들에게 전송하는데, 이 과정에서 내부 기밀 정보가 의도치 않게 공유될 수 있다는 잠재적 우려에 제동을 건 겁니다. 레플리카 측은 “개인정보는 완벽히 안전하다”는 입장이지만, 이용자의 개인 정보와 대화 내역을 포함한 많은 양의 데이터를 수집하는 건 사실입니다.
이 같은 우려에도 AI를 기반으로 한 ‘가상 애인’ 시대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외로움을 달래주는 AI 기반 서비스는 레플리카 이외에도 제공되고 있죠. 미국 인기 여성 인플루언서 카린 마저리는 지난달 GPT-4 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API) 기술을 바탕으로 자신의 목소리와 습관, 성격 등을 복제한 AI 음성 챗봇 ‘카린 AI’ 서비스를 공개했습니다. ‘가상 여자친구’를 표방하는 카린 AI는 마치 마저리와 실제 대화하는 듯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1분당 1달러의 비용이 드는데요. 출시 첫 주에만 10만 달러(한화 약 1억3000만 원)가 넘는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카린 AI를 개발한 포에버보이스는 “팬들이 감정적인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여자친구와 대화하는 듯한 경험을 제공하는 새로운 AI 친구 사업 구상의 하나로 개발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국내에서 대화형 AI 챗봇 ‘이루다’를 서비스 중인 스캐터랩은 2월 또 다른 챗봇 ‘강다온’을 출시했는데요. 강다온은 이루다와 마찬가지로 이용자가 말을 걸면 상황에 맞게 적절한 답변을 내놓습니다. 가상 얼굴을 제작해 만든 가상인간으로 더욱 생생한 캐릭터를 구현했는데, 출시 이후 친구 수가 20만명 가까이 증가했고, 하루 평균 대화량도 26% 늘었다고 합니다. 특히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과 같은 대화 방식에 강다온 이용자의 70% 이상이 여성인 것으로 집계됐다고 하죠.
이처럼 AI 챗봇은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번역, 프로그래밍, 창작에 능할 뿐 아니라 이용자들과 친밀감을 형성하면서 외로움을 해소하는 데 이미 도움을 주고 있는 상황이죠. 인간이 사랑의 대상으로 같은 인간이 아닌 AI를 택하는 경우도, 그리 먼 미래가 아닐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