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국가 백년지대계로 꼽힙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교육제도는 대학입시라는 경쟁구도 속에서 공교육과 사교육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수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죠. 이에 각 정권에서는 이를 바로잡고자 노력했지만, 사실 쉽지는 않았습니다. 과연 윤석열 정부가 던진 ‘공정수능론’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요.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19일 국회에서 열린 ‘학교 교육 경쟁력 제고 및 사교육 경감 관련 당정 협의회’에 참석해 “(수능의) 적정 난이도가 확보되도록 출제 기법을 고도화하기 위한 시스템을 점검하는 등 교육부 수장으로서 모든 가능한 지원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부총리는 “그간 논란이 돼 온, 공교육에서 다루지 않은 소위 ‘킬러 문항’은 시험의 변별성을 높이는 쉬운 방법이지만, 이는 학생들을 사교육으로 내모는 근본 원인이었다”고 꼬집기도 했는데요. 앞서 “공교육 교과 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의 문제는 수능 출제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발언한 윤 대통령과 보다 구체적인 출제 방향을 공언한 이 부총리의 발언을 종합하면, 올 수능 난도가 예년보다 높아지긴 어려울 것으로 전망됩니다. 특히 ‘킬러 문항’은 수능은 물론 9월 6일 예정된 모의평가에서도 등장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죠.
교육부는 초고난도 문항을 출제하지 않고, 공교육 교육과정 위주로 수능을 개편하면서 사교육을 근절하겠다는 방침입니다. 교육 개혁 의지를 드러낸 건 윤 대통령이 강조한 ‘공정 수능’에 있습니다. 사교육 업체와 수능 출제위원 간 ‘이권 카르텔’을 뿌리 뽑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됩니다.
사실 사교육 근절과 공교육의 신뢰를 높이기 위한 개혁은 다수 정부가 추진한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상당수가 ‘역풍’을 맞았는데요. 역대 정권의 ‘사교육 전쟁사’부터 이번 ‘공정 수능론’까지 살펴봤습니다.
교육 개혁은 난제 중 난제로 꼽힙니다. 역대 정권들도 많은 부분을 할애했죠. 맥락은 유사합니다. 사교육 근절을 통한 공교육 정상화인데요. 역대 정권이 교육 개혁에 일제히 공을 들였다는 건 그만큼 쉽지 않다는 점을 방증합니다.
가장 강력했던 정책은 전두환 신군부가 1980년 내놓은 이른바 ‘7.30 교육개혁 조치’입니다. 이 조치의 핵심은 ‘과외 전면 금지’입니다. 모든 학생의 학교 외 수업이 금지됐고, 과외를 하는 교사나 학부모도 단속 대상이 됐습니다. 적발될 경우 학생은 무기정학, 학부모는 직장 해고, 과외 교사는 형사 입건 등 처벌을 받았습니다.
시행 초기엔 과외 열풍을 잠재우는 효과를 거둔 듯했습니다. 그러나 단속을 피해 ‘승용차 과외’, ‘심야 과외’ 등 불법 과외가 기승을 부렸고, 적발을 고려한 ‘위험수당’까지 포함되면서 과외비가 올랐죠. 일각에선 학력 저하 우려까지 나왔습니다.
이에 정부는 1989년 대학생의 과외 교습을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생 과외만 허용되자, 높은 과외비를 충당할 수 있는 가정과 그렇지 못한 가정의 사교육 격차와 함께 시민의 불만도 커졌는데요. 정부는 결국 1991년 초·중·고교 학생들의 방학 중 학원 수강도 허용했습니다.
이후 김영삼·김대중 정부가 ‘과외 전면 허용’ 방안을 검토했으나, 여론 반발에 포기했습니다. 2000년 헌법재판소가 ‘과외 금지’ 조항을 “국민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으로 국민의 자녀교육권, 인격의 자유로운 발현권,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적 규정“이라고 결정하면서 ‘과외 금지’는 완전 폐지됐죠.
과외 금지가 2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후에도 사교육을 막기 위한 시도는 계속됐습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대입 제도 개편에 나섰지만, 대다수가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음 정부에서 폐지되거나 신종 사교육을 부르는 등 역부족이었다는 평가를 받죠.
김대중 정부는 ‘2002학년도 대입 개선안’을 발표하며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무시험 대학 전형, 일명 수시 전형을 도입했습니다. 이에 야간자율학습, 월말고사, 학력고사, 모의고사 등이 전면 폐지됐는데요. 부작용으로 학력 저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2002학년도 수능이 어렵게 출제되면서, 학업보다 특기에 전념한 수험생들은 당시 교육부 장관이었던 ‘이해찬 세대’로 불리며 실패한 교육 정책의 아이콘이 되기도 했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교육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해 ‘2008 대입 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는데요. 핵심은 절대평가를 폐지하고 상대평가 9등급제를 도입했다는 겁니다. 수능은 변별력을 낮추고 점수 없이 9개 등급으로만 표시하기로 했죠. 그러나 이는 내신 경쟁 심화와 ‘죽음의 트라이앵글’에 대한 비판을 불렀습니다. 대학이 변별력을 확보하기 위해 내신에 수능, 논술까지 챙기게 됐다는 지적인데요. 수능등급제는 2008년도 수능에서 한 번 시행되고 이명박 정부에서 곧장 폐지됐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사교육을 잡겠다며 ‘심야 학원 교습 제한’을 추진했습니다. 2008년 서울과 부산에 이어 각 시·도의회에서 심야 교습시간 제한 조례가 통과됐죠. 다만 ‘학습권을 무리하게 제한하고 주말 학원반이 더 활성화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학원계 반발로 법제화는 무산됐습니다. 또 대학에 자율권을 부여하겠다는 취지로 ‘입학사정관제’도 본격 도입했습니다. 수능 대신 창의력과 가능성으로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취지를 가졌는데요. 수능 부담을 줄이겠다며 EBS 교재에서 70%까지 연계하고 국·영·수를 수준별(A·형)로 선택하는 ‘선택형 수능’도 이때 도입됐습니다. 그러나 대학별 입학사정관 선발기준에 맞추기 위해 이른바 ‘현장 스펙’을 쌓기 위한 사교육 부담이 늘어났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신종 사교육이 등장한 셈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선택형 수능을 없애버리고 입학사정관제도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바꿨습니다. 교외 활동을 빼고 교내 활동 위주로 학생부를 작성, 이를 바탕으로 대학이 학생을 선발하는 건데요. 대학별 기준이 공개되지 않으면서 ‘깜깜이 전형’ 비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2014년에는 이른바 ‘선행학습 금지법’(공교육정상화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러나 선행학습도, 사교육비도 줄이지 못한 데다가 처벌 조항도 없어 실효성이 미미하고, 대다수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진행하는 상황에서 비현실적인 제도라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2019년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해 자율형사립고(자사고)·외국어고(외고)를 2025년 일괄 폐지하기로 했습니다. 자사고, 외고 등이 입시 기관으로 변질, 일반고를 황폐화시켰다는 이유에서였죠. 그러나 부산 해운대고, 경기 안산 동산고와 서울 내 8개 자사고가 자사고 지위 취소 무효 소송을 내는 등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당시 1심에서 자사고 10곳은 모두 승리했고, 첫 소송이었던 해운대고가 2심에서 승소하면서 서울, 경기교육청은 항소심을 중단했죠.
이처럼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입시 제도 개선·개혁안이 논의됐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도입 후 성공을 거두지 못한 모습인데요. 전문가들은 사회 전반의 경쟁 구조엔 입시뿐 아니라 대학 서열화, 임금 차별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힌 만큼, 특정 제도를 도입하거나 금지하는 단순한 대책은 실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초대원장이자 국내 대학 입시에 수능을 처음 도입한 ‘수능 창시자’ 박도순 고려대 교육학과 명예교수는 19일 KBS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에서 “사회 체제의 전체 변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사교육 문제를 간단하게 시험 등을 갖고 해결할 수 없다”며 “특히 수능을 바꾸면 사교육이 안 생긴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짚었습니다. 사회 경쟁이라는 근본적 원인이 있기에 입시 일부분을 바꿔서는 사교육 과열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겁니다.
공교육 정상화와 사교육 축소 필요성에 대해선 여야 모두 대체로 동의하는 모양새지만, ‘킬러 문항 배제’가 사교육 근절에 실질적인 효과를 주는지 여부와 언급이 나온 시점 등을 두고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수능이 150일도 안 남은 상황에서 불안감이 커져 학원을 찾는 수험생과 학부모가 늘어나고, 학원가는 이를 마케팅에 활용하는 모순이 반복되는 실정도 문제점으로 지적됩니다.
실로 사교육 시장에서는 이번 ‘킬러 문항 배제’ 언급에 발 빠르게 돌파구를 찾아 나섰습니다. 입시 학원가를 상징하는 대치동에선 이른바 ‘준(準)킬러 문항’, 킬러 문항보다는 다소 쉬운 문항 대비 중심으로 커리큘럼 재편에 들어갔고, 맞춤 설명회를 열고 있습니다. 교육부는 수능의 킬러 문항 배제가 곧 ‘물수능’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며 변별력과 관련해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수험생과 학부모를 안심시킨 한편, 허위·과장 광고 등 학원의 부조리에 대해선 2주간 집중신고 기간을 운영할 계획임을 밝혔는데요. 역대 교육 개혁 시도 사례를 살펴봤을 때, 이번 정부의 지침이 사교육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진 미지수입니다.
킬러 문항 배제는 단기적으론 사교육 시장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분석입니다. 다만 중장기적으로 본다면 역대 정권 사례처럼 오히려 사교육의 존재감을 각인시킨다거나, 신종 사교육으로 학생들을 유인할 수 있다는 우려가 이어지는데요. 이에 앞서 교육계의 본질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학력 중시 풍토와 지나친 경쟁 구조에 대한 사회 전반의 고찰이 전제돼야 했다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