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비금융 신산업 진출 제한
“‘은행들이 과도한 이자 장사를 벌이고 있다’고 경고하는데 우리도 신사업을 하면서 수익성을 다각화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금산분리 규제가 떡하니 가로막고 있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한 시중은행 관계자의 토로)
윤석열 대통령이 4일 지적한 ‘투자 결정을 막는 결정적 규제’ 즉, 금융권의 대표적인 킬러규제 중 하나가 금산분리(은산분리)다. 윤 정부 출범 이후 규제 혁파 움직임이 거세지자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금산분리 규제 완화에 적극 나서 ‘금융권의 BTS(방탄소년단)’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금융권의 혁신을 가로막는 최대 규제 법안으로 꼽히지만, 수년째 뜨거운 감자로 논란만 야기했던 매듭을 풀어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시장에서는 ‘킬러규제를 낱낱이 거둬 내라’는 대통령의 주문이 있었던 만큼 이번에는 규제 철폐 가능성을 기대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금산분리란 금융자본인 은행과 산업자본인 기업 간 상대 업종을 소유·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한 원칙을 말한다.
금산분리는 은행뿐만 아니라 증권, 보험 등 모든 금융업종에 적용된다. 반면 은산분리는 은행자본과 산업자본 간 분리를 위한 것이다. 금산분리가 은산분리보다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금융권에서 논의되는 규제 완화의 핵심은 은산분리 완화에 가깝다. 윤 대통령과 금융당국이 은행권을 저격해 거론한 것처럼 은행들은 신산업 진출을 위해 은산분리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현행 은행법에 따르면 산업자본은 은행 지분 보유 한도가 4%(의결권 미행사 시 최대 10%)로 제한돼 있다. 또한, 비금융주력자는 시중은행과 지방은행 지분을 각각 4%, 15% 넘게 보유할 수 없다.
최근 금융과 비금융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빅블러(Big Blur)’ 시대가 오면서 금산분리 완화에 대한 요구는 커졌다. 네이버, 카카오 등 빅테크 기업들은 인터넷전문은행, 손해보험, 페이 시장에 진출하는 반면, 전통 금융기관들은 규제에 묶여 비금융 시장으로의 진출이 제한된 것 자체가 역차별이라는 주장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리브엠’, ‘땡겨요’처럼 은행들이 신산업 진출을 적극 추진하고 있지만, 금산분리 규제 벽에 막혀 혁신금융서비스로 인정받아야 한시적인 서비스가 가능한 상황”이라며 “부수업무 규제, 자회사 소유 규제 등의 문제부터 하나씩 풀어나가야 금융권 혁신이 더 활발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도 이런 부분을 고려해 금산분리 완화 움직임을 본격화할 방침이다. 지난해 7월 김주현 금융위원장 취임 당시부터 이 같은 논의는 있었지만, 각종 현안에 묶여 제대로 된 검토가 이뤄지지 못했다. 지난해 7월 ‘제1차 금융규제혁신회의’에서 김 위원장은 “금융회사의 디지털화를 가로막는 규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는데 금산분리가 대표적”이라며 “금융 안정을 위한 기본 틀은 유지하되 IT·플랫폼 관련 영업과 신기술 투자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업무 범위와 자회사 투자 제한 규제를 우선 완화하겠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최근에도 금산분리 완화를 언급했다. 그는 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금융권 혁신을 위해 3분기 중 금산분리와 업무 위·수탁 규제를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금융당국은 금융지주사가 비금융회사 지분 한도를 기존 5%에서 15%까지 늘리는 방안을 우선 검토할 것으로 알려졌다. 당장 규제 개선을 위한 문을 활짝 열 수 없겠지만, 금융지주회사법상 제약된 문제를 푸는 것을 시작으로 금융권의 신산업 진출을 위한 첫걸음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해외에서도 금산분리 규제를 완화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일본 금융당국은 2021년 은행법 개정을 통해 은행의 부수업무와 자회사 범위를 확대했다. 인구감소, 저성장 등 구조적 변화과정에서 은행에 기존 은행을 뛰어넘는 적극적인 역할 수행을 요구했고, 업무 범위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그 결과 일본은행들은 다양한 비금융자회사를 설립했다.
일본은행들은 은행업 고도화(시스템·앱 개발, 데이터 분석), 지역경제 활성화(특산품, 해외진출 지원, 관광상품), 기업 생산성 향상(전자계약, 인벤토리금융), 지속가능경영(전력·탄소배출 측정) 등 목적의 자회사를 설립하며 비금융수익을 창출했다.
미국 역시 금산분리 규제가 있지만, 금융회사의 부수업무에 대해 유연한 편이다. 부수업무 허용 여부를 감독권한을 가진 통화감독청(OCC),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서 여러 요소를 고려해 결정한다. 금융회사는 자회사를 통해 은행업무나 부수업무를 수행할 수 있고, 금융업종과 비금융업종 간 구분이 모호한 경우 당국의 탄력적인 운영이 가능하다.
김혜미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빅테크는 금융과 비금융을 넘나드는 서비스가 가능하지만, 은행은 업무 범위 규제로 인해 비금융업 영위가 불가하다”며 “국내 은행도 디지털화에 대응하고 경제성장에 지원하도록 업무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