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 경제는 2차대전에서의 패망을 딛고 선진국에 진입한 모범 사례였다. 그러나 1990년대 초 부동산버블 붕괴 이후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장기 침체(GDP성장률 1%대 이하)에 빠졌고 지금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정부 이래 일본의 경제 제도와 운영방식을 모방했던 한국에서는 더 이상 일본을 따라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는 일본형 장기 침체 경로를 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 우리의 경제 구조나 여건이 과거 일본 경제와 상당 부분 유사하기 때문이다. 저금리에 따른 부동산 거품 및 부채 급증과 뒤이은 거품 파열 및 기업·가계의 파산, 정부·기업의 경제구조·사업모델 혁신 노력 미흡과 이에 따른 생산성 향상 부진, 경기부양 목적의 건설투자 과잉과 이에 따른 정부 부채의 증가, 기업 설비투자의 부진과 해외 유출 등이 현재의 한국과 1980년대 말 이후 일본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현상이다.
게다가 한국이 일본보다 더욱 불리한 조건이 있다. 바로 세계화의 후퇴와 한국의 급속한 저출산·고령화이다. 2010년대 들어 미중 간 헤게모니 갈등 등으로 탈세계화가 확산됐는 바, 2010~2021년 중 세계 상품무역량은 연평균 5.6% 증가하는 데 그쳐 2000년대(9.1%)에 비해 크게 둔화됐다. 앞으로도 세계교역은 세계화 시대의 활력을 되찾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수출을 성장동력으로 삼아온 한국에는 매우 불리한 변화다.
우리나라의 유례없는 저출산·고령화도 소비기반 약화, 생산가능인구의 감소 등을 가져와 경제성장 잠재력을 약화시킨다.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8로 일본(1.26)을 포함한 타 국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낮았다. 반면, 고령화 속도는 너무 빨라 한국의 노년부양비(15~64세 100명당 65세 이상 인구수)는 2022년의 24.6에서 2050년 78.6으로 급증하는(+54.0) 반면 일본의 이 비율은 1990년 17.8에서 2022년 51.2로 높아졌을(+33.4) 뿐이다.
한국이 명실상부한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앞으로도 3% 내외의 성장세를 상당기간 유지하여야 한다. 따라서 위의 불리한 여건을 극복해 일본형 장기 침체를 피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 대책으로는 첫째, 강력한 구조조정을 통해 경제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저효율 산업 및 기업을 정비하고, 부동산 가격의 하향 안정화 및 관련 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와 가계부채 디레버리징을 꾸준히 추진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배출된 노동력과 자본은 신성장산업 등 고효율 부문으로 재배치할 수 있다. 한국 경제의 핵심인 재벌체제를 업종 전문화 및 수출지향성 강화 등을 통해 고부가가치화하고, 공공부문의 정책역량 및 효율성을 향상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공공부문-민간부문 종사자 및 정규직-비정규직 간 보상격차의 축소, 교육 개혁 및 직업교육 강화를 통해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수급 불일치를 개선하여야 한다.
둘째, 고령화·저출산 대응을 위해 공공 주택공급과 보육·교육인프라 확충을 통해 청년층의 주거와 자녀양육 불안을 해소하고 부부의 가사부담 평등화, 노인 일자리 확대 등으로 여성·고령층의 경제활동 참여를 증진하여야 한다. 셋째, 수출 확대를 위해 자유무역주의 노선을 견지해 보호무역주의 등에 대응하는 것이 유리하다. 주력산업·신성장분야의 수출경쟁력 강화, 수출시장의 다변화도 매우 중요하다.
넷째, 우리의 제조강국·통상강국·가교국가 위상을 활용해 ‘불러들이는 세계화’를 추진할 수 있다. 세계 각국의 첨단 소재부품장비 및 신성장 분야 기업, 우수 과학기술인재를 우리나라로 불러모으자. 이는 주요 산업의 공급망 안정, 고용·투자·소비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데이터 및 고객맞춤화 기반 혁신과 세계시장 선점의 추구 등 디지털시대에 적합한 기업·경제 운영 패러다임을 정립해 우리 경제의 디지털전환과 선진화를 앞당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