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팔달산은 과거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사통팔달의 형세를 이룬 곳이라 평하여 남탑산에서 팔달산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조선 대부분의 간선철도는 대체로 청일, 러일전쟁기의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되어 철도와 지역의 연관성이 부족했다. 때문에 조선의 철도는 여객열차의 운행편수와 수송량이 매우 적었는데, 1920년 후반 전반적인 경제 불황으로 화물수입 중심이던 철도건설사업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에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수입처 발굴을 위해 관광산업에 집중, 유서 깊은 수원 화성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1928년, 약 585㎡(177평) 단층 한식 기와집에 팔작지붕을 갖춘 조선 최초 전통한옥역사 수원역이 재탄생하게 되었다. 물론 당시 관광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일부 계층과 일본인의 몫이었다. 일제는 관광을 통해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근대화를 이끌었다고 선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수원역은 거대한 연기를 내뿜으며 증기기관차가 남북으로 달리고, 경기도를 동서로 이어준 수려선과 수인선의 협궤열차가 오가던 곳이다.
2003년 2월 민자역사로 거듭 태어난 수원역은 새마을호와 무궁화호, 일부 KTX를 포함한 모든 여객열차가 정차할 뿐 아니라 수도권전철 1호선과 분당선의 환승역이며 2017년 축구장의 5배 넓이만 한 수원역 환승센터가 설립되면서 명실공히 수도권 최고의 교통 요지가 되었다. 자료=국가철도공단 ‘한국의 철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