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모, 날 무사 나거(왜 나를 낳으셔서), 요런 고셩(이런 고생), 다 시키나…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할머니의 흔들리는 음성으로 들려오는 ‘해녀의 노래’는 때로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오가는 기묘한 주술과도 같이 들린다. 제주 성산 상달리 앞 바다에서 평생 고달픈 노동요를 불러온 해녀 현순직 할머니는 어느덧 생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90대 노인의 몸이 되었다. 파도가 철썩대는 바다에 더는 몸담지 못한 채 지팡이를 짚고 망연히 선 그는, 문득 젊은 시절 바닷속에서 즐겨 보았던 ‘빨간 물꽃’ 이야기를 꺼낸다. “그곳은 나밖에 못 찾아 간다”는 신화와도 같은 설명과 함께.
30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물꽃의 전설’은 무려 80여 년간 해녀 생활을 한 현순직 할머니의 입 끝에서 흘러나온 ‘물꽃’의 존재를 쫓아가는 작품이다. 이 여정의 동반자는 뭍으로 나갔다 고향 제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30대 막내 해녀 채지애다. 현 할머니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바닷속 지도를 구전으로 전해 들은 채 해녀는 ‘들물 여’(들물바위)와 ‘고팡 머흘’(고팡 자갈) 등의 위치를 종이에 그려가며 배우고 익힌다. 해녀의 규모는 점차 줄고 있지만, 어느 교과서에서도 볼 수 없는 노해녀의 머릿속 지혜가 여전히 후대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영화는 연대나 결속을 이야기하는 낭만적인 성격의 작품은 아니다. ‘우리 부모가 왜 나를 낳아서 이런 고생을 다 시키느냐’는 노동요를 입이 닳도록 부르던 해녀들은 때로 발이 닻에 걸려 덧없이 목숨을 잃고, ‘조금 더 벌어보겠다’는 요량에 숨을 오래 참다 세상과 등진다. 목숨을 내어놓고 일하는 이들의 비극이 매년 용왕 할머니에게 삶과 풍요를 비는 ‘영등굿’이라는 믿음으로 승화하는 순간, 관객은 “용왕 할머니가 죽을 고비를 넘기게 도와줬다”거나, “해녀는 죽어서 용궁으로 돌아간다”는 이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몸서리치게 고통스러운 현실을 믿음의 초현실로 승화하고 다시 바다로 나가야만 하는 게 해녀들의 삶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어서다.
해녀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 삶을 기록한 ‘물꽃의 전설’은 한 시절 자기 몸을 바쳐 가계를 꾸리고 가족을 뒷바라지한 헌신자들에 대한 정성스러운 조명이기도 하다. 통상적인 인터뷰 사이로 수만가지 얼굴을 한 바다를 바라보는 해녀의 고요한 모습을 자주 비추는데, 이때 관객의 애상은 한층 끓어오른다. 달빛을 머금고 별처럼 반짝이는 바다, 해 질 녘 노을을 껴안고 기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바다, 물살이 술렁술렁 들이치거나 안개가 희뿌옇게 낀 바다…. 여전히 변치 않는 영험한 공간성을 뽐내는 바다 곁에 그걸 바라보는 해녀만이 어느덧 늙고 작아져 있는 까닭이다.
소멸해 가는 해녀에 대한 어지간한 애정을 품지 않고서는 연출하지 못했을 이 작품은 ‘물숨’(2016)으로 한 차례 해녀 이야기를 선보인 고희영 감독의 신작이다. ‘중국 음식에는 계급이 있다’ 등 유명 다큐멘터리를 방송국에 납품해 온 그는 고향 제주로 돌아와 2016년부터 8년간 해녀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작품을 빚었다. 물질해 먹고 산다는 걸 부끄럽게 여기던 오래된 인식 때문에 문전박대당한 적도 많다지만, 그의 진실한 애정과 성실한 취재에 마음을 연 현 할머니는 어느덧 이렇게 마음을 터놓는다. “부모가 그만큼 물려줄까. 저 바다가 너무 고맙지….” 바다 있어, 해녀는 한평생 살았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