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부터 설치미술, 입체 판화, 비디오아트, 행각(퍼포먼스) 등을 선보인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 김구림의 작품 230여 점과 아카이브 60여 점을 망라한 대규모 개인전이 25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다. 내년 2월까지 약 5개월 반 동안 이어지는 장기 전시로 그간 대중에 공개되지 않았던 신작 두 점도 포함됐다.
전시 개막을 하루 앞둔 24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점에서 열린 ‘김구림’전 언론공개회에 참석한 박종달 관장 직무대리는 “1960~1970년대 젊은 예술가들은 사회적 비판과 몰이해에 시달렸지만 그들의 실험미술은 한국의 미술 영역을 확충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이번 전시의 의미를 짚었다.
이날 휠체어를 타고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김구림 작가는 “(1950년대) 미대를 다니다 배울 게 없어 그만두고 독학으로 공부했다”면서 “캔버스에 사물을 그린다는 게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방향을 돌리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1936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김구림은 1960년대 국내에서 ‘회화 68’ 등 국내 실험미술 집단을 주도했고 1973~1975년 일본에서 설치, 판화 작품 등을 작업하며 무대를 넓혔다. 1984년에는 미국으로 넘어가 나뭇가지를 그림에 부착하는 등의 활동을 선보인다.
2012년 쿠사마 야요이, 앤디 워홀 등과 함께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그룹전에 참여하는 등 그의 전위적인 예술은 세계 무대에서 높게 평가받았다. 현재 미국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등 유력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이번 전시에서는 ‘전자예술 A’(1969, 전구 등 설치), ‘1/24초의 의미’(1969, 컬러비디오), ‘걸레’(1974, 판화와 오브제), ‘풍경’(나뭇가지에 채색), ‘음과 양 91-L 13’(1991, 아크릴 채색에 낚싯대와 양동이) 등 다채로운 기법을 구사한 그의 대표작을 만나볼 수 있다. 한양대학교 앞 살곶이 다리 부근에서 한 차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점에서 또 한 차례 잔디를 태웠던 퍼포먼스는 사진으로 전시됐다.
최초 공개되는 신작 ‘음과 양: 자동차’는 실제 자동차를 찌그러트리고 노란 색을 입힌 모습이다. 분리된 자동차의 가운데로 나무통과 돌, 크고 작은 인간의 신발이 모여 있는 모습은 비극적인 사고와 불운한 희생을 연상케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다음 달 7일 MMCA다원공간에서 열리는 연계 퍼포먼스 행사에도 힘을 줬다. 1969년부터 실험적인 공연을 제작해 온 김구림의 작업을 재현하기 위해 70명의 출연자를 동원해 ‘무제’(무용), ‘대합창’(음악), ‘모르는 사람들’(연극)을 선보인다.
다만 김구림 작가가 1970년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 건물을 광목천 밧줄로 둘러 세간에 신선함을 안겼던 ‘현상에서 흔적으로’ 재구현 작업은 불발됐다.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375호로 등록된 건물을 포함하고 있어 구조ㆍ설계 등에 변화가 생길 경우 사전 심의를 받아 하는 만큼 전시 개막까지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이날 미술관 측의 해명을 듣고 있던 김구림은 “여태까지 보면 뭐든지 (작품을 못 하게 하는) 이유(핑계)가 많다”고 꼬집어 듣던 이들을 웃게 만들었다. 1970년 당시 ‘현상에서 흔적으로’ 작업 역시 초상집을 연상케 한다는 주장에 조기 철거됐으니, 자기 작품을 미술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도에 오래도록 노출돼 온 입장에선 자연스러운 불만일지 모른다. 국립현대미술관 ‘김구림’전, 내년 2월 1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