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에서는 유네스코 무형유산에 등재됐다고 요란한데, 해녀들은 정작 가난해지고…”
2016년 12월 첫날, ‘제주해녀문화’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고희영 감독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두 달쯤 앞선 그해 9월 제주 해녀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물숨’을 극장 개봉했던 그는 영화 막바지에 “제주해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간절히 염원한다”고 쓸 정도로 해녀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제주 해녀의 삶과 현실을 한층 더 깊게 파고든 후속 다큐멘터리 '물꽃의 전설'(2023) 개봉을 하루 앞둔 29일, 고 감독을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나 물었다. 왜 이토록 오래간 제주 해녀를 취재하고 카메라에 담았느냐고. 2009년 ‘물숨’ 촬영을 시작한 그는 신작 ‘물꽃의 전설’까지 10년을 훌쩍 넘기는 긴 시간 동안 집념의 관찰을 지속했다.
고 감독은 “’물숨’을 찍을 때만 해도 제주 해녀가 4500명 남아 있었는데 ‘물꽃의 전설’ 때는 3200명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요즘 해녀들은 더는 바다에서 작업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채취할 거리가 줄어) 점차 가난해지고, 70대 이상 해녀가 과반수를 넘긴 상황”이라는 것이다.
당초부터 후속작을 염두에 뒀던 건 아니었다. 물질해 먹고 산다는 걸 치부처럼 여기던 시절 ’물숨’을 기획한 고 감독은 초반 2년 동안은 해녀 공동체에 카메라조차 들이대지 못할 정도로 박대를 당했다. 수년간 촬영한 분량을 해녀 가족의 반대로 폐기할 수밖에 없었던 일은 다시 돌이켜도 속이 쓰릴 정도다.
“다시는 안 찍으려 했다”던 그의 다짐이 뒤집힌 건, 나이 차이를 뛰어 넘어 ‘물벗’으로 연결된 90대 해녀 현순직과 30대 해녀 채지애의 만남을 지켜보면서다.
감독은 “’물에서 나올 때가 됐는데 안 나오네?’ 하면서 서로를 봐주는 짝이 ‘물벗’이더라”면서 “물벗의 정은 뭍의 전우애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더는 몸을 자유롭게 부리기 어려운 현순직 해녀가 딸과 며느리에게도 안 알려 줄 만큼 귀하다는 ‘머릿속 바닷지도’를 채지애 해녀에게 공유한 이유도 서로가 각별한 물벗이라서다.
다만 ‘물꽃의 전설’이 집중하는 건 두 해녀의 귀중한 연대를 압도하는 무거운 ‘현실’이다. 소라가 가득하고 ‘물꽃’(밤수지맨드라미)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던 90대 해녀의 말을 쫓아 찾아간 바닷 속에는 휑한 물결만이 자리할 뿐이다. “해녀가 늙는 만큼 바다도 병들어 가고 있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소멸하는 것들의 현실을 짚는다.
작품에 숱하게 담긴 제주어 역시 점차 죽은 말이 돼 가는 건 마찬가지다. 90대 현순직 해녀의 말에는 마치 외국어 번역하듯 자막을 달았을 정도다. 제주 출신으로 완벽하게 사투리를 구사하는 고 감독도 “80%밖에 못 알아들어 제주어 사전을 뒤져가며 작업했다”고 한다. 제주어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소멸 위기 언어’ 5단계 중 4단계(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에 등록돼 있다.
고 감독은 "영화에는 해녀, 바다, 제주어라는 세 가지의 소멸이 담겨 있다”면서 “자연소멸이라면 상관 없겠지만, 지킬 수 있었음에도 못 지킨 것들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다른 것”이라고 짚었다.
그의 다음 작품은 4·3사건의 가해자를 추적하는 ‘사월 초사흘’(가제)이다. 취재를 통해 “일본 음악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이자 4·3 당시 여성 희생자를 잔인하게 살해한 가해자를 찾아냈다”는 고 감독은 “일본 촬영만을 남겨두고 있어 올해까지 작업을 마칠 예정”이라고 했다. 기록돼야 할 역사가 ‘소멸하지 않도록’ 애쓰는, 고 감독의 또 다른 분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