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는 많지만 속 시원한 진단과 해법이 없어 답답하다. 우리나라는 과학기술기본법에 따라 5년 단위로 과학기술 정책이 갱신되니 올해 나온 제5차 과학기술기본계획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계획서는 3개의 전략 아래 17개의 추진과제를 도출하고 12개의 국가전략기술을 제시했다.
계획서 작성에 100여 명의 전문가가 참여했지만 대부분 과학자들은 계획서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계획서는 구성이 엉성하여 읽을수록 더 헷갈린다. 실무 과학자의 관점에서 정리하면 계획서는 연구 대상을 명시한 기술 부분과 연구 절차를 명시한 행정 부분으로 양분된다. 기술 부분은 반도체, 인공지능, 이차전지, 원자력 등을 개발하겠다는 계획이고 연구 절차는 참여 연구팀을 선발하고 연구 결과를 사업화하기 위한 전략이다.
과거 우리나라 공공 R&D는 반도체, 디지털 통신 등의 핵심기술을 창출했지만 최근에는 경제의 견인차로서 역할을 상실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의 투자 덕분에 특허 수, 논문 수 등 양적 성장은 겨우 맞춰 가지만 우수 논문이나 핵심기술 건수 등 질적 성장은 뒷걸음질 친다.
이는 우리나라의 국민소득과 수출의 정체 사실로도 드러난다. 미중 냉전으로 촉발된 기술수출 제약 탓도 있지만 우리가 주춤한 사이 중국 기술 수준이 괄목하게 성장한 탓이다.
계획서는 R&D가 도약하기 위해 다양한 과학정책을 제시하지만 진부하다. 5년 전의 4차 과학기술기본계획서에서 제시된 과학 전략이 오히려 덜 진부했다. 비슷한 과학정책을 5년마다 돌려막기 하고 있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아니다.
사실 전략을 아무리 세워도 혁신적인 기술 하나가 뿜어내는 영향을 이기지 못한다. 올해 나온 챗GPT가 미친 영향은 계획서의 어떤 한 전략보다 충격적이었다. 인도의 달 남극 착륙은 전략보다 탁월한 과학자의 역량 덕분이다.
기술 수준을 평가하는 지표에서는 우리나라 과학자의 사대주의를 느낄 수 있다. 이 지표값은 국내 전문가 설문으로 얻어지며 국내 기술을 선진국 대비 80% 수준으로 보고 있다. 국제기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이 지표를 애용한다.
이 지표를 고수하는 한, 토끼가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철학자 제논의 역설처럼 한국 과학은 선진기술을 따라잡지 못한다. 중국은 기술 수준 지표를 폐기한 덕분에 한국을 뛰어넘고 미국을 뛰어넘었다.
자기 비하적인 지표 대신 세계 1등 상품의 수, 노벨 수상자 수를 명시할 때 과학기술은 발전한다. 물론 과학기술기본계획은 GDP 대비 R&D 투자율, 상위 1% 세계적 과학자 수, 첨단기술 수출액 등 객관적인 목표값을 제시했다. 문제는 목표값을 명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현의지가 약하다는 데 있다. 현재 값의 근거도 약하고, 지난 3차 4차 기본계획의 목표값도 달성 못 한 선례가 있다.
지역 소멸을 막으려 R&D 지역 센터를 세우고, 인구 감소에 대처하려 인재 양성 계획을 언급하고 있다. 당연한 R&D 정책으로 보이지만 이는 과학정책자의 욕심이다. 저출산율을 대비한 연구보다는 자녀를 낳은 신혼부부에게 직접 지원하는 편이 효과적이다. 지역소멸을 고려한 연구보다는 지방 거주자에게 직접 혜택을 주는 편이 낫다.
프로 선수보다 아마추어 선수를 관리하기 어려운 법이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참여자가 다양하면 정책은 산으로 간다. 우수한 과학자가 열정적으로 연구하도록 과학정책을 펼쳐야 한다. 소명을 지닌 과학자가 혁신적인 연구결과를 낼 가능성이 높다. 냉정하지만 과학 정책은 ‘수우미양가’를 추구하고 ‘우수미양가’의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연구를 하다 보면 우연히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증언은 진리일 수 없으며, 그것은 노력한 자의 겸손이다.
국회 심의 과정에서 삭감된 R&D 예산이 조정되어야 하고 기술패권을 추구하는 국가는 국제 협력으로 핵심 기술을 내어주지 않는다. 아쉬운 소리는 이것으로 족하다. 필자를 포함한 과학자들은 핵심기술을 빚어내고 세계적인 과학자를 꿈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