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은 죽음과 함께한 시간이었다. 지난달 본지가 8회차에 걸쳐 보도한 ‘해피엔딩 장례’ 기획 취재팀에 합류해 7월부터 3개월 넘게 장례 관련 취재를 했다. 기사를 쓰기 위해 천안에 내려가 임종체험을 했고, 의정부에 있는 을지대병원에서 장례지도학과 교수와 학생들을 만났다. 이 외에도 ‘생전 장례식’을 계획 중인 전직 국회의원, 반려견 옆에 묻히고 싶다는 노인 등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하면 ‘공부’였다. 해외에서는 이미 타나톨로지(thanatology : 죽음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타나톨로지는 ‘죽음의 구현’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타나토스(thanatos)에서 유래한 용어다. 죽음을 수동적으로 맞이하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끌어들여 구현해야 한다는 개념이 흥미로웠다.
이정선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교수는 ‘죽음학의 공교육’을 주장했다. 그는 기자에게 “자살률이 극도로 높은 한국 사회에서 죽음학은 자살률을 낮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고 말했다. 죽음에 관한 공부가 유한한 삶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삶의 풍파에 쓰러진 사람들에게 죽음학은 어떤 영향을 미칠까?
2020년 한국교양교육학회에서 발표한 논문 ‘삶과 죽음을 성찰하는 타나톨로지(죽음학)의 대학 공교육을 위한 인식조사’에 따르면, 죽음학은 ‘자신과의 대면’을 가능하게 한다. 죽음에 관한 공부가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는 임종체험 과정 중 유언장 쓰기 시간에 많은 참가자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와 맥이 닿아있다.
취재 중에 만난 한 시민은 “유언장을 쓰면서 나를 객관화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인간은 자신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유언장 쓰기는 그것을 어느 정도 가능하게 한다. 비록 유사 죽음이라도 삶을 마무리한다는 감각은 자신을 관망하도록 하는 태도를 부여한다. 나에게서 나와야 나를 볼 수 있다. 죽음학에서 말하는 자신과의 대면이다.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매년 유언장을 새롭게 쓴다”고 밝혔다. 유언장을 쓰면서 지난 1년의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현재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어 그는 타나톨로지를 강조하면서 “사람도 언젠가 꽃잎처럼 질 텐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죽음의 의미를 사회학과 철학의 관점에서 탐문한 천선영 작가의 책 제목이 ‘죽음을 살다’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삶만 잘 살아야 하는 게 아니다. 죽음도 잘 살아야 한다. 천 작가는 한국을 ‘죽음이 낯선 사회’로 정의한다. “죽음을 알면 삶이 커진다”는 그의 주장은 죽음이 금기시할 영역이 아니라 이해되고 소통해야 할 세계임을 일깨운다.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 다만 인지하고 공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공부가 자신을 객관화하는 데 도움을 주고, 삶은 물론 죽음을 풍요롭게 한다. 마침내 인간이 죽음을 살게 한다. 그게 타나톨로지의 의미이기도 한 죽음의 구현이다. 우리가 죽음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