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복수, 마약 수사, 불륜, 사형….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며 눈길을 끌던 드라마들 사이에서 ‘따뜻한’ 드라마 하나가 등장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입니다.
지난해 말부터 올 초까지 열풍을 일으킨 ‘더 글로리’를 필두로 ‘모범택시2’, ‘국민사형투표’등 사적 복수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드라마판을 장악했습니다. 여기에 ‘막장’의 대가, 임성한·김순옥 작가의 ‘아씨두리안’, ‘7인의 탈출’ 등 눈길을 뗄 수 없는 거친 이야기가 연달아 등장했는데요. 이어지는 자극적인 이야기들에 시청자들의 피로도 점차 누적된 상황이었죠.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 눈길이 쏠린 것도 이 때문일까요? 작품은 앞서 인기를 끈 드라마들과는 달리 위로와 공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3일 공개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정신건강의학과 근무를 처음 하게 된 간호사 다은(박보영 분)이 정신병동 안에서 만나는 세상과 마음 시린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라하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하죠. ‘지금 우리 학교는’를 연출한 이재규 감독과 ‘눈이 부시게’를 쓴 이남규 작가가 의기투합했습니다.
7일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 시청 순위 집계 사이트인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전일 기준 국내 TV쇼 부문 1위를 차지했습니다. 여기에 21개국 TV 쇼 부문 TOP10에도 이름을 올리면서 호평을 얻고 있습니다.
언뜻 봤을 때 혁신적인 새로움은 느껴지지 않는 듯합니다. 병원을 배경으로 삼은 콘텐츠는 이미 너무 많고, 주연 배우인 박보영은 8월 개봉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도 간호사 역을 맡은 바 있죠.
그러나 작품을 감상한 시청자들은 연신 호평을 내놓고 있습니다. 한 누리꾼은 “의학 드라마인 듯 심리 드라마 같고, 힐링되는데 (감정이) 깊다”며 “신선하다”고 평가했는데요. 자극적인 이야기의 향연 속,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가 전한 재미부터 의미까지 살펴봤습니다.
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많은 콘텐츠의 주인공은 의사입니다. 어려운 수술의 성공이나 실패, 이를 통한 성장, 동료와의 우정, 혹은 병원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그리던 의학 드라마는 캐릭터의 개성과 매력에 기댄 채 전개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이 문법에서 벗어났습니다. 의사 중심의 이야기가 아닌, 간호사와 환자의 이야기로 시선을 돌리면서요.
주인공 다은은 3년 차 내과 간호사였는데요. 배려 있는 태도 때문에 오히려 동료들의 빈축을 샀고, 이 때문에 정신과로 옮겨 가게 됩니다. 안 그래도 낯선 환경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데, 정신과에서도 이전 과에 있었던 동료 간호사들의 험담은 이어졌습니다.
이런 다은이 처음으로 마주한 환자는 1인실에 입원한 ‘오리나’(정운선 분)입니다. 그는 발레를 했고, 공부도 잘한 데다가 ‘금수저’, ‘판사 사모님’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부러워 할 것 같은 인물이지만, 그는 극심한 양극성 장애(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돌연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발가벗고 춤을 추고, 망상에 빠져 한 남자를 스토킹하기도 했죠.
오리나의 어머니는 그런 딸을 사위 몰래 정신병동에 입원시킵니다. 누구보다 딸의 상태를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하지만, 정작 딸의 속마음은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죠. 사실 오리나는 엄마의 ‘풍족한 속박’ 속에서 마음의 병을 키우다가 자신을 잃어버린 인물인데요. 모든 걸 벗어던질 때의 카타르시스 덕분에(?) 살고 있었죠.
다음으로 다은이 눈여겨 보게 된 환자는 ‘김성식’(조달환 분)입니다. 그는 분노조절장애, 자격지심이 있는 상사로부터 부당한 업무 지시와 언어폭력, 가스라이팅 등을 당하며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는데요. 다은도 과거 수간호사가 자신의 험담을 쏟아내는 걸 보고 충격받은 바 있기에, 그에게 눈길이 갔을 듯합니다.
이외에도 공황장애, 우울증, 망상장애 등을 가진 다양한 환자가 등장하는데요. 초반 실수를 연발하며 어려움을 겪던 다은은 수간호사 효신(이정은 분)을 비롯해 동료 간호사들과 교수진들과 함께 환자들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방법을 배워나갑니다. 그는 환자들을 이해하면서 자신도 몰랐던 마음의 병을 인지하고, 이로 인해 환자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죠.
배우들의 호연에 대해서도 시청자들 호평이 나옵니다. 특히 박보영에 대해서는 이재규 감독도 “다은은 자신이 편한 것보다 환자들이 편한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박보영을 보며 ‘다은보다 한 수 위구나’라고 느낀 순간이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요.
박보영은 다은을 연기하기 위해 병원에서 간호사들을 직접 만났다고 합니다. 자신이 맡은 역의 직업에 대해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였는데요. 또 10년간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해온 것도 캐릭터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일조했죠.
박보영은 제작발표회에서 “(간호사들을) 쫓아다니면서 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엄청 적었다”며 “조금이라도 내가 간호사처럼 보였다면 그건 서울성모병원에 있는 간호사들 덕분”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소아중환자를 돕는 자원봉사를 할 때 간호사와 굉장히 가까이에서 하는 일들이 많다. 시간이 지나 편해진 간호사들이 많은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게 도움이 많이 됐다”고 전했습니다.
노련한 연출도 눈길을 끕니다. 먼저 정신병동은 무채색이 아닌 다채로운 색을 이용해 꾸며졌습니다. 의료진 의상에도 따뜻한 색상을 이용했는데요. 실내 공간에서도 부드럽고 따뜻한 색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돼 밝고 희망찬 분위기를 형성했습니다. 이재규 감독은 “정신병동 이야기이지만 너무 무겁지 않고 시청자에게 편안하게 다가갔으면 하는 마음에 분홍, 주황 등 동화 같은 색감으로 병동 세트장을 만들었다”고 설명한 바 있죠.
극 중 환자들과 시청자의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려 한 노력도 체감됩니다. 망상 환자들이 보는 망상이 그대로 구현되고, 공황장애 환자의 경우 밀폐된 공간에 물이 차오르는 모습이, 우울증 환자는 깊은 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습이 그려지면서 이들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했죠.
자칫 민망할 수 있는 장면은 판타지 요소를 섞어 거부감을 줄였습니다. 이에 정신과와 정신질환에 대한 기존 관념보다는, 환자 하나하나의 이야기와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돋보이게 됩니다.
앞서 박보영은 제작발표회에서 “(정신병동의) 문턱이 낮아졌으면 좋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요. 이 같은 배우들의 노력과 연출은 모두 정신병동과 환자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속 환자 대부분은 사회로 인해 병을 키운 경우입니다. 특히 다은을 비롯해 김성식, 송유찬(장동윤 분) 모두 직장 생활로 인해 상처 입은 인물이죠. 송유찬은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상사와 동료들의 부담으로 인해 결국 부적응자로 낙인찍히고 공황장애를 겪습니다.
작품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사는 것 역시 이 부분입니다. 공황장애와 조울증, 불안 장애 등 현대인이라면 미약하게나마 경험해 봤을 만한 정신질환을 그려내는데요. 이 같은 질환들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주변 환경에 의해 발현되고,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도움으로 역경을 극복하는 인물들의 모습까지 보여주면서 ‘힐링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정신병동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 편견을 깨뜨리는 동시에 ‘누구든, 어디든, 어떤 아픔을 갖고 있든 밝은 아침을 맞게 될 것’이라는 응원과 긍정의 에너지를 전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까닭입니다.
작품은 단순히 정신질환과 환자들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게 아니라, 현대인이라면 누구든, 언제든 맞을 수 있는 아픔을 조심스럽게 제시하면서 공감과 몰입을 자아내고 있는데요. 이재규 감독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대부분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 같다”며 “내 병이 어디에서부터 왔고 그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작품이고, 보면서 심리적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작품을 설명했죠.
이처럼 자극적인 소재, 거친 이야기가 아닌 따뜻한 위로와 공감을 자아내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넷플릭스에서 전편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15세 이상 관람가, 총 12부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