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남 영화평론가/계명대 교수
미국은 1930년대부터 8mm/16mm 무비카메라와 가정용 영사기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동네마다 필름현상소가 있었다. 웬만한 중산층이라면 가족 행사를 촬영해 영사기로 돌려보며 즐기는 문화가 일찍부터 자리 잡았다. 이에 착안해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자신들의 고전영화를 8mm나 16mm로 대량 복사해 저렴한 비용으로 일반에 대여해주는 사업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본격 붐이 일어나 1970년대 후반까지 미국 전역에서 수많은 필름대여소가 성업했다. 한편 1970년대 들어서며 케이블과 위성방송 시스템이 도입됐고, 곧이어 가정용 VCR(Video Cassette Recorder)이 출현하며 할리우드는 새롭고도 특별한 기회를 얻게 됐다.
1975년에 일본의 소니(Sony)는 폭 2분의 1인치(약 12.7mm)의 자기 테이프에 영상을 기록하고 재현하는 베타(betamax)방식의 홈 VCR을 시장에 공식 출시했다. 소니는 다른 전자 회사들이 번거롭게 별도 방식의 모델을 만들지 않고 자사의 단일 표준을 따라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JVC’가 VHS(Video Home System) 방식을 곧장 내놓았고, 전 세계 주요 가전사들도 합세하며 VCR 제품의 기술 표준을 두고 격렬한 전쟁이 시작됐다.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혈전 속에서 소니는 시장을 석권할 기회를 거듭 놓쳤고, 반소니 연합전선의 VHS 방식에 끝내 완패하고 사업에서 철수했다.
미국은 1990년대 이전에 이미 전체 가정 중 70%가 VCR을 보유하고 있었다. VCR이 전면 보급됨에 따라 수많은 영화들이 ‘비디오카세트’로 제작됐고, 집에서 비디오로 영화를 감상하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대여 시장에 불이 붙었다.
이로써 할리우드의 메이저들은 윈도의 확장 덕분에 영화 한 편을 가지고 OSMU(One Source Multi Use)의 체제를 구축하며 제2차 황금기로 접어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VCR이 급속도로 보급되며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 비디오 유통·대여점 사업, 비디오방 등이 큰 호황을 누린 바 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킴스 비디오’는 뉴욕 일대에서 성업했던 대여점 ‘킴스 비디오’의 회원이자 단골손님이었던 데이비드 레드먼과 애슐리 사빈이 총 6년이라는 시간과 광기 어린 공력을 들여 공동 감독, 제작, 촬영, 편집해 완성한 작품이다. 23세에 미국으로 건너간 한인 이민자 ‘김용만(용만 킴)’ 씨는 뉴욕 소재 자신의 세탁소 한켠에서 비디오 대여 사업을 시작했다.
여느 대여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세계적 희귀본들과 해적판까지 구비하고 있었기에 영화학도, 영화광들에게는 영화문화 거점이자 성지가 됐다. 유명 감독과 배우들이 단골 고객으로 드나들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에 힘입어 한창때는 11개의 지점에 300여 명의 직원, 멤버십 회원 25만, 30만 편에 달하는 비디오 컬렉션을 구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잠깐 사이 비디오 시대는 막을 내렸고 ‘킴스 비디오’ 역시 버텨내지 못했다.
2008년, 마지막 매장을 정리하고 수십만 편의 비디오는 세계 각처에 기증되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데이비드 레드먼과 애슐리 사빈은 ‘킴스 비디오’를 사랑한 모든 영화광들을 대신해 ‘킴스 비디오’의 종적을 찾아 나섰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소도시 살레미에 기증된 채 방치된 5만여 편의 비디오를 되찾아 왔고, 그 모든 과정을 카메라에 생생히 담아냈다. 마침내 ‘킴스 비디오’는 ‘뉴욕 알라모 극장’에 대여점을 재오픈하며 새로운 삶을 이어가게 됐다.
광적인 집념으로 이룩한 모든 과정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특별한 감회로 다가왔다. 그것은 김용만 대표의 ‘영화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헌신’의 결과로 포장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한 이민자의 돈벌이나 어떤 세속적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음을 생각하며 나는 전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