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적 분노와 현실적 분노 결합한 '전두광' 캐릭터
실존 인물ㆍ비극적 역사 극화할 때 제기되는 문제들은 '고민'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은 전두광(황정민)을 위시한 하나회 세력의 반란을 저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태신(정우성) 등 일부 군인들의 분투를 그리고 있다. 전두광은 전두환을, 이태신은 쿠데타 당시 수도방위사령관이었던 장태완을 모티브로 했다. 신파를 배제한 군더더기 없는 연출, 별다른 총격 장면 없이도 긴장감을 자아내는 ‘전화 싸움’이 주요 볼거리다. 샛길로 빠지지 않고 쾌속 질주하는 매끈한 장르영화다.
돌출되는 장면들도 있다. 영화에는 반란군 진압을 위해 광화문 근처를 지나는 이태신의 시점으로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포착하는 장면이 나온다. 허구적 캐릭터라도 실존 인물에 영감을 받은 이태신을 구국의 영웅으로 묘사하는 듯한 연출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잉이다. 이태신이 바리케이드와 철조망을 넘어 전두광에게로 향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두 장면 모두 영화의 전체적인 결을 해치는 수준은 아니다.
캐릭터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극장을 빠져나오는 관객들의 일차적 반응으로만 재단하면, ‘서울의 봄’은 이태신이 아닌 전두광의 영화다. “징글징글하다”, “너무 화가 난다”, “속이 터진다” 등의 감정적 반응은 전두광으로부터 기인한다. 이 영화의 관람 후기를 심박수로 측정해 SNS에 올리는 ‘분노 챌린지’는 하나의 놀이가 됐다. 그러므로 전두광에 관한 캐릭터 분석은 ‘서울의 봄’을 파악하는 흥미로운 방법 중 하나다.
전두광에게 쏠리는 대중의 날 선 반응은 실제 역사와 직결되는 혐오적 감정과 결부되어 있다. 황정민의 연기도 주효했지만, 1980년 5월 18일의 광주가 얼마나 무참했는지 아는 관객들은 스크린 바깥의 분노를 극장 안으로 가져와 전두광에게 투사한다. 그러니까 전두광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나쁜 인간’으로 상정돼 있다. 사람들은 전두광(혹은 ‘그 사람’)이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극장에 간다.
그렇다면 전두광은 악인 캐릭터로서의 매력이 충분한가? 한국 현대사의 맥락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전두광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들도 분노가 치밀까? 배우는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는 존재다. 하지만 특정 캐릭터가 영화의 내적 논리에 따라 그 자체로 생동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배우의 연기(혹은 이미지)에 기댄다거나 스크린 바깥의 요인들에 의해 지배당한다면 좋은 캐릭터라고 말하기 저어되는 측면이 있다.
전두광은 영화적 분노와 현실적 분노가 결합한 캐릭터다. 역사적 맥락을 다 걷어내고 봐도 전두광은 악한이다. 이럴진대 참담한 현대사의 비극을 초래한 인물을 영화로 가져올 때, 현실과 영화를 분리해서 보기란 쉽지 않다. 다만 스크린 바깥의 요인들이 스크린 안의 캐릭터를 과도하게 지배하는 듯한 느낌엔 물음표를 제기하고 싶다. 이는 극악한 연쇄살인마를 미남 배우가 연기할 때, 악함이 무화되는 불편한 감정과 맥이 닿아있다.
물론 정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쿠데타 성공 직후, 영화는 고문당하는 이태신의 모습과 화장실에서 기괴하게 웃는 전두광의 모습을 교대로 보여준다. 악랄한 전두광의 웃음은 관객들의 분노를 치밀게 하고, 심박수를 높였을 것이다. 이는 일말의 반성과 사죄 없이 떠난 ‘그 사람’에 대한 현실적 분노와 연결돼 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현실의 연장이자 반영이다. 이것이 영화의 힘이기도 하다.
요컨대 악인의 행위에도 나름의 사정이 필요하다. ‘서울의 봄’에는 이 같은 사정이 괄호로 묶여 있다. 권력에 취한 전두광이 군사 반란까지 감행하는 명분을 영화는 뚜렷하게 제시하지 못한다. 당연히 역사적으로 12·12 쿠데타에는 아무런 명분도, 당위도 없다. 하지만 그것을 극화해 영화로 표현하는 건 다른 문제다. 캐릭터 역시 마찬가지다. ‘그 사람’은 정말 나쁜 인간이었지만, 전두광도 그렇다는 것은 영화적으로 설득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