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별세한 김수용 감독이 주로 활동한 시기는 1960년대다. 그는 이 시기에 '혈맥', '저 하늘에도 슬픔이', '갯마을' 등 수많은 영화를 연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Renaissance)를 열었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가 양적ㆍ질적으로 크게 성장한 시기였다. 전쟁으로 모든 생활 기반이 붕괴했지만,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자 했던 영화인들의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빛을 발했던 순간이었다.
또 영화인들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 '광복', '이념 대립', '전쟁' 등의 프로파간다적 소재에서 벗어나 영화의 순수성과 미학적 가치를 고민했다.
특히 고인은 주로 소설이나 희곡 등 문학을 원작으로 한 '문예영화'를 만들었다. 고인은 문학을 단순히 스크린으로 구현하는 데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인장을 새겨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발판을 마련했다.
'한국영화 역사'의 저자 김미현은 "한국 모더니즘 영화로 불리는 이만희의 '귀로', 김수용의 '어느 여배우의 고백', 이성구의 '장군의 수염' 등은 유럽영화의 영향을 받은 영상미학을 선보이면서, 도시의 소외와 근대화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정치적ㆍ미학적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1965년에 개봉한 고인의 최고 흥행작 '저 하늘에도 슬픔이' 역시 동명의 수필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는 윤복(김천만) 등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희망 가능성을 말하는 이 영화는 한국 사실주의 영화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윤복이 동생들과 함께 손수레를 끌고 언덕을 지나가는 모습을 멀리서 담아낸 장면은 대학에서 롱 숏(long shot : 멀리찍기)의 미학을 설명할 때 자주 거론된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인구가 500만 명이던 서울에서 29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그해 관객 동원 1위는 물론 흑백영화 사상 최다 흥행 기록을 세웠다.
필름이 유실돼 관람할 수 없었지만,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제보로 대만영상자료원이 필름을 보관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후 한국영상자료원은 영화 복원 작업에 착수했고, 2014년 일반에 공개됐다.
1960년대에 고인을 비롯해 김기영, 신상옥, 유현목, 이만희 등의 감독들은 비평적으로 우수한 작품들을 많이 내놨다. '로맨스 빠빠(신상옥)', '오발탄(유현목)', '귀로(이만희)', '안개(김수용)' 등 한국영화의 고전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탄생했다.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은 김기영 감독이 연출한 영화 '하녀'의 후속작인 '화녀'에 출연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윤여정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저는 이 상을 저의 첫 번째 감독님, 김기영에게 바치고 싶다"며 "아주 천재적인 분이셨고 제 데뷔작을 함께 했다. 살아계셨다면 아주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밝혔다.
영화 '기생충'으로 칸영화제와 아카데미에서 최고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 역시 '기생충'이 '하녀'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는 1960년에 개봉했다. 이층 양옥집에서 벌어지는 부자와 빈자의 대립을 그린 작품으로 '기생충'과 형식적ㆍ내용적으로 유사한 측면이 많다.
1960년대는 한국의 산업화가 본격화하던 시기로 '중산층'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했다. '하녀'는 당시 중산층의 불안이 응집된 장소로 이층 양옥집을 제시한다. 김기영 감독은 이층 양옥집이라는 유토피아적 공간이 언제라도 붕괴할 수 있음을 하녀라는 상징을 통해 형상화한다.
이처럼 고인을 비롯해 1960년대에 활동한 감독들은 지금의 한국영화가 세계인의 찬사를 받을 수 있는 영화적 씨앗을 뿌렸다.
'한국영화사'의 저자 정종화는 "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르네상스' 시기라 부른다"며 "'황금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1960년대의 영화 제작편수는 무려 1500편을 넘는 엄청난 다산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장르영화의 틀 혹은 문예영화라는 제도를 빌려 뛰어난 작품들이 생산되기도 했다"며 "양적ㆍ질적 측면에서 1960년대 한국영화는 '르네상스'라는 이름을 부여받을 만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