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 절반 이상이 경영 불확실성으로 내년 투자 계획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어제 발표한 매출 500대 기업 2024년 국내 투자계획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 기업(131개)의 55.0%가 계획이 없거나 미정인 것으로 나타났다. 내년 투자 계획을 아직 세우지 못한 기업 비중은 지난해 조사 때(38.0%)보다 11.7%포인트(p) 증가했다. 대내외 경영환경이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대기업들은 ‘3고’(고금리·고물가·고환율) 현상을 가장 많이 우려했다. 투자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시설투자 신·증축 관련 규제(28.8%)라고 했다. 투자 환경을 개선할 주요 정책과제로는 금리 인하(28.8%)와 법인세 감세 및 세제 지원 강화(22.6%) 등이 제시됐다.
‘내년 투자 청사진이 있느냐’만의 문제가 아니다. 재무적 정황부터 녹록지 않다. 국내 5대 은행의 11월 대기업 대출 잔액은 138조3119억 원으로 10월보다 9267억 원 늘었다. 9월 말 기준 연체율은 0.14%로 8월보다 0.01%p 상승했다. 빚을 갚기조차 버거운 대기업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기업 현장의 살얼음판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인건비 부담도 계속 늘고 있다. 매출 500대 기업 중 366개 상장사의 지난해 평균 연봉이 2019년보다 19.2% 상승했다는 민간 기업분석연구소의 조사결과도 있다. 이 기간은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대다수 대기업 실적이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원가는 상승하고 인건비 부담은 커졌다. 이런 구조에서 기업 경쟁력이 하락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외려 이상한 일이다.
미래가 걸린 투자는 후순위로 밀렸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올해 3분기까지 10대 제조업 기업의 설비투자가 연초 제시한 목표(약 100조 원) 대비 약 66% 이행되는 데 그쳤다. 정부는 킬러 규제 개선, 특화 단지 국가 산단 지정 등 투자 유인책을 폈다. 하지만 헛구호에 그쳤을 공산이 크다.
당국은 말만 앞선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더 적극적으로 투자 활로를 열어줘야 할 책무도 무겁다. 미래 투자에 속도가 붙으려면 법제적 접근이 시급하다. 우선 법인세 최고세율(24%)을 대폭 낮춰야 한다. 과세표준구간을 조정해 현행 4단계 누진 구조도 완화해야 한다. 올해 한시 적용된 10% 임시투자세액공제 혜택 기간 연장도 필요하다. 미국은 대규모 세금 감면과 보조금 혜택을 주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칩스법(반도체 및 과학법)으로 투자 유치, 일자리 창출 등에서 큰 효과를 봤다. 본보기는 미국 사례만이 아닐 것이다.
대기업은 산업생태계의 중심이다. 자본 투입과 기술 혁신을 추동하는 엔진이고, 양질의 일자리를 책임지는 시장복지의 중추다. 국내 대기업 절반이 투자 계획을 망설인다는 것은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이 약해진다는 얘기다. 저성장 경고가 안팎에서 날로 커지고 있다. 귀족노조 편들기에 바쁜 나머지 기업 발목이나 잡는 국회부터 확 달라져야 한다. 기업이 없으면 일자리도, 노조도 없다. 경제 활력을 원한다면 대기업을 도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