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제철 영화 ‘이터널 선샤인’ 통해 살펴보는 ‘기억 조절 기술’ [오코노미]

입력 2023-12-0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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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은 알렉산더 포프의 시 ‘Eloisa to Abelard’에서 따온 것이다.‘티 없는 마음에 비치는 영원한 햇살’이라는 뜻을 가진다. (출처=네이버 영화)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니체의 말을 빌려 망각의 기쁨을 말하고 있는 이 여성은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 라쿠나의 직원 매리다. 매리가 일하는 라쿠나사를 찾은 조엘. 조엘은 연인과 헤어진 후 그와 관련된 기억을 모두 지우고자 라쿠나 사를 찾았다.

상담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조엘은 전 연인 클레멘타인과 관련된 기억을 모두 지우면 편안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앞서 홀로 기억 속에서 자신을 지워버린 클레멘타인이 원망스럽다. 그러나 어쩐지 조엘은 기억을 지우면 지울수록 고통을 느낀다. 갈등하던 순간은 물론 행복했던 시간들도 함께 지워지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감지한 조엘은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기억 속에 숨고 도망친다. 그러나 결국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냥 음미하자”며 기억 속 클레멘타인과 함께 순간을 누린 뒤 모두 잊는다.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다시 사랑에 빠진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이미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왔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은 다시 이전에 겪었던 아픔을 반복할까 두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다시 사랑하기로 마음먹는다. ‘티 없는 마음에 비치는 영원한 햇살’, 우리를 만들어 가고 있는 기억과 사랑에 대해 말하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다.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몬탁에서 만나”라는 말을 남기고 서로를 잊는다. (출처=네이버 영화)
겨울을 아름답게 그려내 ‘겨울 제철 영화’라고도 불리는 ‘이터널 선샤인’은 많은 이들에게 인생영화로 남아있다. 2004년 영화임에도 2015년 재개봉 당시 50만 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이끌어 내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를 발하는 명작’이며 ‘역대 최고의 멜로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관객들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으로 ‘공감 가는 스토리’를 꼽는다. 영화를 감상할 때 필요한 것은 ‘각자의 경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관객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통해 지우고 싶지만, 그렇다고 지울 수 없는 각자의 시간들을 떠올린다.

▲기억을 지우기 위해 라쿠나 사를 찾은 조엘. (출처=네이버 영화)
기억을 선별적으로 지운다는 것은 영화 속 판타지 요소지만, 현실에서도 관련 연구 성과가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다. 지난달 초 서울대학교 기초과학연구원 학습 및 기억 연구그룹은 특정 뇌 영역에 있는 신경 회로의 스냅스를 표지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드디어 공포 기억만 ‘선별해’ 지울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해당 연구는 국제학술지 ‘뉴런’에도 실렸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에서 뉴런들 사이의 시냅스를 종류별로 구별하는 방법인 ‘LCD-eGRASP’라는 기술을 새로 개발했는데 이 기술을 통해 기저외측편도체의 억제성 뉴런이 기억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저외측편도체란 공포와 관련된 기억을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진 뇌의 부분인데 기저외측편도체의 억제성 뉴런 중 하나인 소마토스타틴 인터뉴런의 상태에 따라 공포 기억 반응에 변화가 나타난다. 이는 소마토스타틴 인터뉴런을 적합하게 조율하면 공포 기억을 자의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연구팀을 이끄는 강봉균 단장은 “억제성 인터뉴런을 통한 기억 조절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며 “향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같은 질병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고 강조했다. 연구팀은 앞으로 뉴런을 넘어 뇌를 구성하는 다양한 세포들과 기억저장 세포의 상호작용에 대해 연구할 계획이다.

▲기저외측편도체 내의 시냅스 표지. (출처=기초과학연구원)
다른 방법도 있다. 바로 영화 ‘맨 인 블랙’에서 불빛을 내밀며 상대의 기억을 지우듯 ‘빛’을 활용해 기억을 조절하는 방법이다. 흔히 ‘광유전학’이라고 불린다. 광유전학은 유전학과 광학을 결합해 뇌의 뉴런 활동을 조절하는 기술로 2010년 과학 학술지 네이처에 올해의 기술로 선정된 이후 전 세계적인 연구를 통해 점점 그 정확도가 높아지고 있다.

치매, 파킨슨 병, 간질,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등 다양한 증상을 완화하는 데 사용된다. 한국에서도 기초과학연구원과 카이스트는 광유전학을 통해 빛을 뇌세포에 쏘아 뇌 기능과 기억, 감정, 행동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인 ‘Opto-vTrap(옵토-브이트랩)’를 개발했다. 이전까지는 체내 대사과정 중 이온 교환 작용에 따라 세포 안팎에 생기는 전위 차이를 활용하는 ‘세포 전위차’ 조절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 방식은 원하지 않는 다른 자극을 유발할 수 있으며 전위차에 반응하지 않는 세포에는 사용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와 달리 ‘옵토-브이트랩’ 방식은 세포 소낭을 직접 특이적으로 조절할 수 있어 원하는 시점에 다양한 종류의 뇌세포에서 이용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직 인간에게 적용할 정도는 아니지만, 뇌 질환 치료에 활용하기 위해 계속 개발 중이다.

▲인간은 기억을 통해 스스로를 인식하는 ‘자의식’을 가지며 타인과 자신을 구별된 개체로 바라봄으로써 ‘정체성’을 형성한다.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치매, 조현병, 파킨슨병 등 뇌 질환 치료에 대한 높은 관심과 적극적인 트라우마 치료가 요구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관련 기술의 수요가 많아질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하다.

다만, 일부 트라우마 치료 전문가들은 기억을 지우는 것보다 좋지 않은 기억을 인정하고 더 좋은 기억으로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좋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영화 속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고통을 피하고자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했음에도 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더 큰 고통을 호소한 것과도 연결된다. 기억은 인간의 정체성과 성격이 확립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와 관련해 광화문 숲 정신건강의학과의 김인수 원장은 “기억은 우리가 타인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지니고, 하나의 온전한 개체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우리의 정신적 토양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따라서 기억을 지우기로 결정하기 전에 충분한 상담과 자문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기술을 통해 타인의 기억을 조작하려 하는 등의 악용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AI 윤리 연구소장 필립 켈마이어는 “사람의 기억을 편집하거나 억제하는 것은 한 사람의 정체성에 혼란을 줄 수 있다”며 기억 조작 기술이 타인을 도구화하거나 세뇌하는 등의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타인에 의해 악용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치료 과정에서의 오류로 인해 트라우마와 관련된 기억이 아닌 다른 기억을 지우게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치매 치료, 트라우마 치료 등 기억을 조절하는 기술이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와 함께 기술의 부작용도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기술의 도입 범위와 정도를 결정함에 앞서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윤리적 성찰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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