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경동고에서 치러진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 1교시 국어영역 시험 종료 1분 30초 전, 타종 교사의 오인으로 시험 종료벨이 울렸습니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며 거칠게 항의한 수험생도 있었으나 시험지는 곧바로 회수됐습니다. 대다수의 수험생이 답안지 마킹을 못하거나 무작위로 마킹해 제출했는데요. 사고 발생을 인지한 시험 본부에서는 2교시 종료 후 점심시간을 활용해 1교시 시험지와 답안지를 배부해 1분 30초의 추가시간을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본부는 2교시와 점심시간이 예정대로 진행된 터라 수험생들 간에 문제 공유가 됐을 수 있다고 판단해 답안 수정은 불가했는데요. 수험생들에게 허용된 것은 걷었던 시험지에 표시된 정답을 답안지에 옮기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에 시험을 포기 후 귀가하거나 당황해서 이어진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는 수험생들이 대한민국과 감독관에게 2000만 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같은 날 제주시 남녕고에서는 1교시 시험 종료 5분을 남기고 고사장이 정전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요. 시험을 치르던 수험생들은 예비고사실로 이동해 시험을 치르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정전은 시험장 인근 전신주 개폐장치 이상 탓에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들 수험생에게는 추가시간 5분이 주어졌고, 전체 고사장의 시험 시작 시각을 맞추기 위해 남녕고 수험생들은 2교시 시험을 타 고사장보다 7분 늦게 시작했습니다.
매년 11월, 수능과 관련된 사고가 발생합니다. 문제 출제에 대한 항의도 매년 빗발치지만, 그중 가장 큰 사고들은 ‘시간’ 혹은 ‘듣기’ 관련 사고인데요. 시험 시작·종료 시간 타종 사고와 듣기 평가에서 방송사고 문제는 매년 발생하곤 합니다. 오죽하면 항공편 운항 시간도 ‘듣기 평가’ 시간에 이·착륙하지 못하게끔 조정되곤 하죠.
한 번의 사고가 앞으로 1년을 좌우하는 만큼 수험생들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수능과 관련된 이의신청 제도를 활용할 수 있지만, 평가원은 ‘문제’ 자체의 오류에 대해 이의신청을 검토할 뿐 고사장의 운영은 교육부와 각 시도교육청에 이관합니다. 따라서 실제로 피해를 본 수험생들은 국가와 감독관을 교육당국에 소송을 제기하는데요. 실질적인 보상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대표적인 소송 사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2010학년도 수능 3교시 영어 듣기평가 도중 방송시설 고장으로 지필평가 중 듣기평가가 시행됐는데요. 한 수험생이 이에 당황하여 이후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였다며 서울시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재판부는 ‘서울시는 방송시설을 사전에 점검해 공정하게 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할 주의의무에 소홀해 응시생들이 상당한 혼란을 겪게 했기 때문에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라는 이유로 수험생에게 200만 원, 부모에게 각 50만 원의 위자료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2016학년도 수능에서는 1교시 시험 시작 전 감독관이 ‘스톱워치 기능이 있는 시계는 반입이 안 된다’라는 점을 알리려다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자 ‘잔여 시간이 카운트되는 시계는 반입이 안 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디지털식 시계를 지닌 한 수험생은 시계를 제출하였고, 시험장에 별도의 시계가 비치되어있지 않아 시간 확인을 못한 채 시험을 치는데요. 수험생은 국가와 감독관에게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였고 법원은 500만 원의 위자료를 배상하라고 판결했습니다.
#2019학년도 수능에서는 1교시에 감독관이 시간을 착각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8시 25분 예비령이 울리면 답안지를 배부하여 인적사항을 기입하도록 하고, 8시 35분 준비령이 울리면 문제지를 배부, 인쇄상태와 면수 등을 확인하도록 한 뒤 8시 40분 본령이 울리면 시험을 시작해야 하는데요. 그런데 감독관이 본령이 울릴 때까지 문제지만 배부하고 답안지는 배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본령이 울린 후에도 수험생들이 문제지를 보지 못하게 제지했고 한 수험생으로부터 시험 시작 시간이 되었다는 말을 듣자 비로소 문제를 풀도록 허용했습니다. 수험생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자 법원은 200만 원의 정신적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2020학년도 수능에서는 수능 제1 선택과목 시간에 타종이 3분 일찍 울리는 사고가 발생했는데요. 사고 발생 2분 후 타종을 강제로 종료하고 오류가 있었음을 밝힌 뒤 시험시간을 2분 연장했습니다. 당시 수험생과 학부모 등 25명은 국가와 서울시를 상대로 1인당 8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1심에서는 수험생에게 인당 2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하였으나 2심에서 인당 700만 원으로 배상액이 상향됐습니다.
앞선 사례들을 확인하였을 때 학생과 학부모 측이 승소할 시 몇백만 원의 배상금이 주어집니다. 재판부는 직권 재량으로 사례마다 배상액을 다르게 책정하는데요. 재판부는 △피해자의 연령, 직업, 사회적 지위, 재산과 생활상태, 피해로 입은 고통의 정도, 피해자의 과실 정도 등 피해자 측의 사정과 △가해자의 고의·과실의 정도, 가해행위의 동기와 원인, 불법행위 후의 가해자의 태도 등 가해자 측의 사정을 참작해 위자료 액수를 확정합니다.
하지만 배상금을 받는다고 해서 상처가 치유할 순 없습니다. 이번 경동고 사건에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 재수생 A 군의 학부모는 “지난해 홍익대학교에 합격했으나 더 높은 꿈을 위해 재수를 택했다”라며 “집안 형편이 어려운데 학원비로 월 300만 원 이상 내며 수능을 준비했으나 망쳤다. 아이를 포함해 모든 가족이 절망감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라고 호소했습니다.
이에 국가적인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는데요. 교육부는 타종 매뉴얼은 있으나 공개하지 않겠다는 방침입니다.
김우석 법무법인 명진 변호사는 “한 문제 차이로 입시 등급이 나뉘는 수능에서 ‘수동 타종’이라는 것부터가 시스템이 노후했다는 것”이라며 “2020년 타종사고 당시에는 현장 감독관들이 실시간으로 대처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다르다. 어떤 수험생이 답안지 제출할 때 공란으로 채우겠냐. 사고를 인지한 즉시 조치했어야 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이 같은 사태에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서울시교육청에서는 피해 학생들의 입시 상담 등 추가 지원을 계획하고 있다”라며 “매년 새로운 사례 생기면 현장서 순간적인 판단한다. 이것들이 쌓이면 매뉴얼 보강을 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이에 김 변호사는 조 교육감의 발언에 대해 “교육청이 지원을 해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실효성 없는 행정 처리”라고 반박하며 “결국 교육부의 진심 어린 사과와 재발방지책을 체계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