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의 ‘2+2 협의체’가 어제 네 번째 회의를 열었지만, 또 빈손으로 끝났다. 지난번엔 신속 처리를 원하는 법안 10개씩을 뽑는 시늉이라도 했다. 이젠 그러지도 않는다. 국민이 두렵지도 않은 모양이다. 대한민국 국회의 올해 마지막 임시회 본회의가 내일 열리지만, 기대를 걸기가 쉽지 않다.
국회 처리를 기다리는 법안들은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중대재해처벌법 개정안은 상시근로자 50인 미만 중소사업장에 대해 기존 일정표대로 내년 1월 27일부터 법 적용을 하는 대신 2년 유예하는 내용이다. 지난해 1월 시행된 중대재해법은 근로자 사망 등 중대재해 발생 시 사업주·경영책임자를 1년 이상의 징역이나 10억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다. 중소·영세업계가 얼마나 불안할지는 불문가지다. 대상 기업의 94%가 영세성을 고려해 준비 기간이 더 필요하다고 호소하지만 국회, 특히 거대야당은 귀를 닫고 있다.
우주항공청 설치 3법도 급하다. 우주항공 분야는 세계적 각축장으로 미국, 프랑스, 일본, 중국, 인도 등이 사활을 걸고 뛰고 있다. 한국은 대조적으로 한가롭다. 국제 경쟁에 가세하려면 우주항공청 신설이 필수적이지만 입씨름만 하면서 시간을 물처럼 쓴다. 한국항공우주산업진흥협회가 우주항공 종사자, 대학생·대학원생 65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93% 이상이 우주항공청 설립에 동의한다고 했다. 일반 여론도 우호적이다. 그런데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대형마트 휴무일에 온라인 배송을 허용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 비대면 진료 제도화 의료법 개정안, 부실시공 처벌을 강화하는 건설산업기본법 개정안 등도 모두 국민 편익과 안전을 증진하는 법안들이다. 역시 정쟁 바람에 밀려 자칫 해를 넘길 판국이다.
여야는 앞서 8일 정기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147건의 법안과 안건을 허겁지겁 처리했다. 직무유기 비난을 줄이겠다고 회기 만료를 하루 앞두고 무더기 처리를 한 것이다. 법안 문안들을 제대로 읽어봤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더 어이없는 것은 도매금으로 법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중대재해법, 유통산업발전법, 의료법 개정안 등은 제외했다는 점이다. 입법권력 지형으로 미루어 거대야당이 정략적 쟁점을 입맛대로 다룰 지렛대로 쓰기 위해 술수를 부린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내일 본회의에서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과 대장동 50억 클럽에 대한 특검법을 강행 처리하기로 했다. 각종 민생법안은 볼모나 다름없다. 원내 다수당이 입법권을 오남용하는 모양새다. 특검법이 민생과 대체 뭔 관련이 있는가.
민생법안과 정치 쟁점은 패키지 상품이 아니다. 정치적 이해타산이 중요하다 해도 왜 민생법안부터 처리하고 당당히 싸울 생각은 못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정쟁보다 민생’이란 기본 인식조차 없는 이들이 분에 넘치는 권력을 휘두르니 국민이 인질이 되고 민생이 볼모가 되는 것이다. 어쩌다 이런 국회가, 이런 국가가 됐는지 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