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눈의 본체는 얼음 알갱이다. 대기 기온이 낮아지면 구름을 이루는 물방울은 작은 얼음 결정으로 변하는데, 여기에 주변의 수증기가 달라붙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걸 ‘눈’이라 한다.
눈 결정은 보통 육각형 형태지만 가지가 뻗은 모양으로 자란 경우를 자주 본다. 습도가 높을 때는 수증기가 주로 결정의 모서리로 모이기 때문에 이런 결정 형태가 생긴다. 반면 습도가 낮은 환경에선 육각형 가판만이 커지게 된다. 로맨틱한 눈 풍경의 대명사인 함박눈 역시 과포화 수준의 높은 습도 아래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진 눈 결정으로, 폭신(?)하고 많이 내리는 게 특징이다.
함박눈 외에도 가루눈, 싸라기눈 등 눈 종류는 많지만 모두 ‘하늘에서 내려오는 얼음 결정’이란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만일 하늘에서 내리지 않고 나뭇가지 안에서 솟아나는 듯한 얼음 형태가 있다면 어떨까? 놀라운 건 겨울 아침 유럽 숲을 걷다 보면 실제로 이런 현상을 만날 수 있다.
노인의 백발을 연상케 하는 ‘헤어 아이스’(Hair Ice)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는 죽은 나무에 가늘고 부드러운 털 형태로 형성되는 얼음으로, 아이스 울 또는 서리 수염으로도 불린다. 습도가 높아야 하고, 기온도 섭씨 0도보다 약간 낮은 때에만 만들어질 수 있어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생성 장소 역시 북위 45~55도의 활엽수림으로 한정된다. 하지만 일단 헤어 아이스를 만들어 낸 나무는 그 후에도 반복해서 생성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헤어 아이스의 구조는 매우 독특하다. 얼핏 보면 하나의 솜뭉치처럼 생각되지만, 실은 최대 직경이 0.02mm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가늘고 긴 개별 가닥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얼음실은 부분적으로 맞닿아 있음에도 합쳐지지 않고 웨이브 형태를 몇 시간 혹은 며칠씩 유지하면서 최대 20cm까지 자란다. 녹는점인 섭씨 0도에 가까운 온도에선 작은 얼음 조각이 더 큰 조각으로 재결정(結晶) 되려는 성질에 있음에 비춰볼 때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재결정 과정이 방해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헤어 아이스의 최초 관찰자는 독일의 기상학자인 알프레드 베게너(Alfred Wegener, 1880~1930)다. 그는 헤어 아이스가 특정 종류의 곰팡이에 의해 촉진되고 형성된다고 추측했다. 그의 이론은 이후 여러 과학자들에 확장되었고, 2015년에 베른 대학의 크리스티앙 메츨러(Christian Matzler) 교수와 동료들에 의해 입증되었다. 연구팀의 발표에 따르면 헤어 아이스가 만들어진 모든 나무에서 일종의 곰팡이 균인 ‘Exidiopsis effusa’가 발견됐다. 해당 균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목재 표면에 얼음이 만들어지긴 하지만, 헤어 아이스 형태를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이 균류가 특이한 모양의 얼음실을 만들어 내는데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곰팡이가 헤어 아이스를 만드는 데 어떤 생물학적 혹은 화학적 과정이 관여하는 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헤어 아이스가 죽은 나무의 내부 즉, 나무 껍질을 벗겨낸 안에서 만들어지는 걸로 보아 곰팡이의 신진대사 활동, 다시 말해 나무 안에 있는 영양분을 먹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며 열을 발생시키는 등의 활동이 가는 실 모양의 얼음 결정을 만드는 데 영향을 주는 걸로 보고 있다. 또한 개별 얼음실이 안정적으로 자기 모양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곰팡이가 부동액 단백질과 같은 재결정 억제제를 제공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헤어 아이스는 얼음실이 나무에서 섬세하게 뻗어 나가는 모습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지만 특정 종류의 나무에서만 나타나는 등 생태학적으로도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지속해서 연구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