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호의 정치원론] 탈대중사회 ‘정당의 길’ 찾아야

입력 2024-01-0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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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아메리카학회 회장

정치판 혁신, 사람만 바꿔선 ‘실패’
획일적 집단주의에 정치권 마비돼
다양성 인정…유권자부터 깨어나야

연말연시면 회자(膾炙)되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을 정치권이 앞장서 외치고 있다. 4·10 국회의원선거를 백일쯤 앞둔 현재 시점에 여야 모두 낡음을 버리고 새로움을 맞겠단다. 국민의힘은 정치신인 한동훈 전 법무장관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해 쇄신의 돛을 올렸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에 질세라 외부 학자 임혁백 교수를 공천관리위원장으로 영입해 혁신의 신호탄을 쐈다. 여야 양당에서 뛰쳐나온 몇몇 인사는 신당 창당으로 새로움을 추구하겠단다. 앞으로 여기저기서 정당 공천과 선거운동이 진행될 때 변화·변혁은 실천 표어로 더욱 크게 들릴 것이다.

문제는 정치권에서 송구영신의 의미가 왜곡,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낡은 인식, 가치, 행동, 규범, 관습, 제도를 새롭게 바꾸는 것이 그 원래 의미이다.

일반 시민의 신년 인사에 등장하는 송구영신은 새 마음으로 새롭게 행동해 새로운 결실을 얻자는 다짐과 소망을 뜻한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사람만 바꾸는 것으로 그 뜻이 좁아졌다. 기존 정치인들을 새 얼굴로 교체하는 경쟁만 펼쳐지고 있다. 정작 기존의 인식, 가치, 행동, 규범, 관습, 제도를 어떻게 바꿔 어떠한 새 판(시스템, 패러다임)을 가꿀지에 관한 말은 구색용 고명으로 살짝 나오거나 아예 들리지도 않는다.

물론 정치판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 인적 교체는 중요하다. 그러나 낡은 틀은 그대로인데 사람만 바뀐다고 정말 달라질 수 있을까. 깨진 독에 물 붓기요, 새 술을 썩은 부대에 담기와 마찬가지다.

과거에도 정풍, 개혁, 창당, 정계 개편, 적폐 청산 등 현란한 이름으로 정치 변화를 시도한 적이 많다. 그때도 인적 교체만으로는 여지없이 실패가 뒤따랐다.

표피적으로 사람들만 바꾸면 두 가지 점에서 상황이 오히려 악화한다.

첫째, 마치 정치판이 진짜 새로워진 듯 단기적 착시 효과가 나타난다. 그러면 근본 틀을 바꾸려는 노력은 아예 간과하게 되고 구습이 유지된다.

중장기적으로는, 변혁해도 현실이 나아지지 않는다고 느낀 유권자가 정치는 원래 그러려니 무력감·냉소주의에 빠지고 정치 자체를 더욱 불신하게 된다.

둘째, 정치판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경험 부족과 신세 진 빚으로 인해 기존 틀에 휘둘린다. 틀을 고치겠다는 확고한 국정철학과 의지보다는 면모가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들어온 신인들일수록 그렇게 된다.

그러면 이들 자신도 곧 기존 세력으로 전락하고 다음번 무늬만 개혁의 소모품으로 폐기된다. 이런 악순환이 연속되며 기존 판의 지배구조가 영속화된다.

정치판을 바꿔야 한다. 무엇이 낡은 가치, 옛날 인식, 구습, 시대착오적 제도인지 규명하고,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고칠지에 고민을 경주해야 한다. 안타깝게, 정치권은 이 난제는 회피하고 당 지도부나 국회의원들의 인적 교체, 그것도 일부의 인적 교체를 개혁인 양 선전하는 데 골몰한다. 그래야 기득권의 최고 정점에 있는 여야 권력자들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구습과 낡은 제도 속에서 여야 최고 기득권자들은 권력과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그걸 잘못 건드리면 권력과 이익을 잃을 수 있어 언급조차 삼간다. 대신 정치인 일부를 희생양으로 삼고 새 인물들을 병풍처럼 포진시켜 기득권을 지키려 한다.

최고 기득권자들이 악착같이 매달리는 가장 낡은 구습은 바로 획일적 정당 집단주의이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내부 다양성을 허용치 않는 경직된 머신(machine) 문화를 말한다. 내부 비판자는 비주류로 몰아 구박하고 당내에서 버티기 힘들게 한다.

한국 민주주의가 여러 면에서 진일보했으나, 유독 정당정치에서는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정당은 물론 어느 정도의 기율과 통일성을 갖춰야 정치체제의 구심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해선 곤란하고, 세상이 복잡하고 다양한 ‘탈대중사회’(post-mass society)로 이행한 만큼 수권 정당이라면 내부 다양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변해야 한다.

한국 정당들이 여전히 과거 대중사회의 유물인 획일적 집단주의에 빠져 경직된 통일성을 신성시할수록 상호 관계는 강 대 강 양극적 충돌로 치닫는다. 이분법적 여야 전쟁이 정치권을 마비시키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다. 이런 판을 바꿔야 한다. 유권자가 깨어나, 부분적 인적 교체에 현혹되지 말고 근본 틀의 혁신을 요구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권도 정신 차려 진정한 ‘송구영신’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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