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임대형의 '윤희에게'다. 남편과 이혼한 윤희는 고등학생 딸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윤희 앞으로 일본에서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그 편지는 윤희가 어릴 적 사랑했던 친구 쥰의 고모가 보낸 것. 그 편지로 인해 윤희는 쥰을 만나러 일본 여행을 결심한다. 아름다운 오타루의 눈빛으로 가득한 이 영화는 로드무비의 형식을 차용해 성소수자인 중년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재발견하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며 끝맺는다.
'러브레터'와 '윤희에게'를 묘하게 섞어 놓은 듯한 영화가 있다. 바로 토드 헤인즈의 '캐롤'이다. 영화는 캐롤과 테레즈라는 두 여성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겨울의 양가적 분위기를 스크린에 잘 담았다. 특히 캐롤과 테레즈가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 시선의 교차가 인상적인 영화다. 테레즈를 연기한 루니 마라는 이 영화로 68회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캐롤을 맡은 케이트 블란쳇의 고혹적인 연기도 일품이다.
신형철 서울대 교수의 책 제목을 가져와 표현한다면, '캐롤'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관한 영화다. 캐롤과의 여행을 앞둔 테레즈에게 남자친구는 (아마도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은 테레즈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 "너 지금 미쳤어"라고 비난한다. 이에 테레즈는 환멸 섞인 표정으로 남자친구를 응시하며 "평생 오늘처럼 머리가 맑은 적이 없었어"라고 맞받아친다. 테레즈는 왜 하필 '맑다'라는 동사를 썼을까?
이전까지 남자를 사랑하는 척하며 살았던 테레즈의 머리는 아마도 불투명한 상태였을 것이다. 결국 사랑이 사람의 머리를 맑게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정확하게 사랑한다는 감각이 사람의 머리를 맑게 하는 것이리라. 사랑은 모호한 감정이 아니라 정확한 행동이다. 퀴어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았던 테레즈는 캐롤을 정확하게 사랑함으로써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자신을 재발견한다. 새로운 삶은 그렇게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