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남 영화평론가·계명대 교수
“마법의 왕국에서 소원을 빌어봐”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1918년, 미국 인구는 1억 명을 돌파했다. 당시 미국에는 1만 8000개에 이르는 싸구려 극장 ‘니켈로디언(Nickelodeon)’과 2000개에 이르는 영화궁전(Movie Palace)이 있었고, 매주 6000만 명이 영화를 관람했다. 4800여 개에 이르는 영화 관련 법인이 등록돼 있었다.
그런데 1920년대에 어마어마한 합종연횡이 이루어지며 8대 메이저 체제로 급속한 재편이 이루어졌다. 이른바 할리우드 스튜디오시스템의 구축이다. 영화의 제작과 유통(배급), 판매(극장 상영)라고 하는 기본 축을 수직 계열화한 영화재벌의 출현이었다. 지난 100년 동안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은 수다하고도 커다란 부침을 겪었지만, 세계 시장 70~80%를 지속적으로 독점해 오고 있다. 더욱이 198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는 동안 그들의 지배력은 더욱 공고해져 왔다.
업계 질서가 위와 같이 확립돼가던 시절 메이저에 흡수·통합되지 않고 할리우드 밖에서 자신들만의 색깔을 가진 작품을 만들어 온 영화사들을 인디펜던트(독립제작사)라고 한다. 그런데 메이저와 인디 사이에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무장한 스튜디오가 있었으니 바로 애니메이션 전문 ‘월트 디즈니사’다. 형인 ‘로이’와 함께 ‘월트 디즈니(1901~1966)’는 LA 버뱅크에 전문 제작사를 설립(1924년)했다. 그가 만들어낸 ‘미키 마우스’, ‘도날드 덕’, ‘플루토’ 등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일련의 작품들은 어린이와 대중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특히 대공황으로 인해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이 드러나고 모두가 힘겨움과 혼란의 소용돌이 가운데 처해 있던 시기에 미키 마우스는 시대를 지탱하는 희망의 표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이 악동 캐릭터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좌충우돌 분투하면서도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전통적인 가치관과 사회 윤리의 틀 안에서 소망을 충족하는 환상적인 방식으로 재미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순진한 인물들에게 닥쳐온 돌연한 공포와 재앙, 악몽 같은 모든 상황 속에서 소망을 잃지 않고 분투해 끝내 모든 혼돈을 바로잡고 승리하는 서사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관객과 익숙한 컨벤션을 구축하며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가 제작한 수많은 애니메이션 영화들은 세계로 뻗어나가 온 세상 어린이들에게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와 미국식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대한 환상을 심어 왔다.
월트 디즈니는 시대를 읽고 한 박자 빠른 대응으로 규모를 키워 온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는 세계 최초로 삼색 테크니컬러 기술을 이용한 애니메이션 ‘꽃과 나무(Flower and Trees)’를 제작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를 제작하기도 했다. 미키 마우스를 필두로 자신이 만든 캐릭터들을 연관 상품으로 연결해 부가가치를 극대화하는 방안을 마련하며 애니메이션 영화뿐만 아니라 캐릭터를 산업화한 주인공이 됐다.
1950년대 스튜디오시스템이 붕괴하며 8대 메이저들이 줄도산할 때, 디즈니에게 있어서 TV의 등장은 위기가 아니라 특별한 기회가 됐다. 누구보다 먼저 그 중요성을 깨닫고, TV 방영용 소품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제작·방영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는 생전의 마지막 역점 사업으로 디즈니랜드 테마파크 놀이동산(1955년. 애너하임)을 세계 최초로 개장하기도 했다. 오늘날 디즈니랜드는 아시아 지역에 3곳(도쿄, 상하이, 홍콩), 파리에 유로 디즈니, 플로리다 등 여섯 곳에서 황금알을 계속 낳고 있다.
최근 디즈니가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위시(Wish)’가 개봉했다. 이 작품은 디즈니가 제작한 62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며, ‘겨울왕국’ 시리즈, ‘모아나’의 계보를 잇는 야심작이다. “그대의 소원을 말해 보라, 마법의 왕국에서 소원을 이루어주겠다”고 한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은 매번 이 판타지 왕국의 부름에 응답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