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24일 개봉한 ‘시민덕희’는 이날 관객 6만1108명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정상에 직행했습니다.
그간 1위를 지키던 ‘외계+인’ 2부는 1만8907명을 동원하는 데 그치며 2위로 한 단계 내려앉았고, ‘시민덕희’와 같은 날 개봉한 뤼크 베송 감독의 신작 ‘도그맨’은 1만188명을 모아 3위로 첫발을 디뎠죠. ‘위시’(9958명), ‘서울의 봄’(8459명)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시민덕희’는 보이스피싱을 당한 평범한 시민 덕희(라미란 분)에게 사기 친 조직원 재민(공명 분)의 구조 요청이 오면서 벌어지는 통쾌한 추적기를 그립니다.
배꼽을 잡게 하는 코믹 연기부터 뭉클한 모성애까지,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라미란과 ‘극한직업’(2019)으로 천만 관객을 기록한 공명, 여기에 엄혜란, 박병은, 장윤주, 이무생, 안은진 등이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면서 개봉 전부터 눈길을 끌었는데요. ‘1킬로그램’, ‘선희와 슬기’ 등 단편으로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는 박영주 감독이 연출을 맡아 기대를 더했습니다.
그러나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영화의 모티브가 ‘실화’라는 사실이죠.
세탁소 화재로 거처를 잃은 덕희는 대출상품을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에겐 은행의 ‘손대리’라는 인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는데요. 덕희에게 딱 맞는 상품이 있다는 것이었죠. 손대리는 덕희에게 대출을 받기 위해서라며 돈을 요구하고, 대출이 절박한 덕희는 그의 요청대로 돈을 입금합니다. 그러나 이는 보이스피싱 범죄였죠.
놀란 덕희는 경찰서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형사들은 덕희의 사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한심하게 바라봤습니다. 망연자실한 덕희는 또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사기를 친 손대리가 자신을 조직에서 꺼내달라는 구조 요청을 한 겁니다.
잃은 돈을 찾아 두 아이를 지키겠다고 결심한 덕희. 그는 결연한 얼굴로 동료 봉림(염혜란 분), 숙자(장윤주 분)와 함께 직접 보이스피싱 조직의 본거지라는 중국 칭다오로 향합니다.
경찰도 포기한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의 총책을 잡겠다는 이야기는 얼핏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2016년 발생한 실화를 모티브로 하죠.
당시 40대 주부였던 김성자 씨는 경기도 화성에서 작은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인 그는 보이스피싱으로 3200만 원을 잃었는데요. 한 달 뒤, 보이스피싱 조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총책을 알려줄 테니 자신을 도와달라는 구조 요청이었죠.
김 씨는 영화처럼 중국으로 가진 않았지만, 직접 움직였습니다. 조직원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범죄조직의 본명과 인적사항, 한국으로 입국할 날짜와 비행기 시간까지 수집한 건데요. 그는 경찰에 이 정보를 넘겼지만, 경찰은 증거가 부족하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에 김 씨는 경찰 대신 보이스피싱 조직원을 계속 설득하면서 총책의 최근 모습이 담긴 사진과 은신처 정보, 중국 산둥성에 있는 사무실 주소, 보이스피싱의 표적이 된 800명의 개인 정보와 실제 돈을 뜯어낸 피해자들의 명부까지 수집했고, 이를 경찰에 제출했습니다.
김 씨의 활약으로 경찰은 총책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지 닷새 만에 그를 붙잡았는데요. 당시 경찰은 보이스피싱 제보자에게 1억 원의 보상금을 지급하겠다며 대대적인 홍보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김 씨에게는 범인을 검거했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고, 보도자료에서도 김 씨의 공로를 일절 언급하지 않았죠. 이 사실이 알려지자 곳곳에서 경찰이 공을 가로챈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고, 포털과 경찰서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경찰의 행태를 비판한 글이 잇따랐습니다.
보상금 지급까지 미루던 경찰은 언론의 취재가 시작된 후에야 김 씨에게 지급 기준에서 가장 낮은 100만 원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김 씨는 이를 거절했고, 담당 경찰의 업무 태만 등에 대해 지방경찰청에 진정서를 제출했죠.
실화는 다소 ‘고구마’스럽게 마무리됐지만, 영화는 상상력을 더했습니다.
박영주 감독은 작품을 위해 사건의 주인공인 김 씨와 경찰, 보이스피싱에 가담했던 조직원까지 인터뷰했습니다.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을 잡겠다며 직접 중국으로 출국하는 용감한 덕희, 그리고 그의 옆을 든든하게 지키는 친구들의 연대를 유쾌하게 풀어내면서 통쾌한 결말을 그려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죠.
박영주 감독은 “피해자분들과 경찰분들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이, 피해자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바보 같아서 당했다는 자책감을 느낀다는 것이었다”며 “피해자가 자존감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잘 돌아가는 과정을 그려보자는 마음으로 덕희의 심리묘사와 다른 주변인들의 심리 묘사를 중점으로 생각하면서 드라마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김 씨의 사연이 전해진 당시에는 경찰을 향한 비판 여론이 거셌지만, 영화가 수사기관의 잘잘못을 고발하는 데 맹목적으로 힘을 쏟진 않습니다. 수사기관이 피해자를 바라보는 일차원적인 시선의 문제점은 지적하되, 용기 있는 소시민 덕희의 모습과 동료들의 따뜻한 연대를 보여주는 데 주력하는데요. “모든 건 무지한 내 잘못”이라고 자책하던 덕희가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을 잡고, 조직원이던 재민이 조직에서 탈출하면서 자존감을 회복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피해자에 대한 동정이나 힐난이 아닌 용기와 정의를 보여주면서 따뜻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죠.
라미란 역시 이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덕희는 억울함과 답답함을 해소하려는 추진력이 있고 용감한 인물”이라면서도 “덕희가 영웅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냥 개인의 자존감에 관한 이야기라고 봤다. 특히 후반부 장면에서 가장 큰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다. 잘못한 게 없고 고개 숙일 일이 없는 덕희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나오는 장면이 그런 지점과 연결되는 것 같다. 작품을 그렇게 이해했고, 그래서 그 장면에서 좋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는 매년 잇따릅니다. 지난 6년간 국내에서 발생한 보이스피싱 누적 피해액은 3조 원을 훌쩍 넘습니다. 범죄수법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죠. 과거에는 억양에서 외국인인 게 느껴지는 범죄자들이 어설픈 한국어로 사기를 시도했지만, 최근에는 금융기관이나 검사, 수사관 등을 사칭하며 피해자들을 현혹하는 경우도 잦습니다.
‘시민덕희’ 속 이야기가 남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데요. 이에 영화 내용에 공감하는 관객들의 반응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관람객들은 “영화는 유쾌했지만, 그렇지 않은 현실에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30만 원이지만 보이스피싱 당했던 게 생각나서 울컥했다. 아직도 범인을 못 잡았다”, “이제는 흔하게 접하는 범죄라 더 몰입하게 된다”, “보이스피싱은 고학력자도 당할 수 있는 범죄다. 피해자가 바보가 아니라 열심히 일할 에너지를 남의 돈 가로채는 데 쓰는 범죄자들이 진짜 바보” 등 반응을 내놨죠.
공교롭게도 영화가 개봉한 24일, 대검찰청과 은행연합회가 금융거래를 악용해 범람하는 보이스피싱과 불법사금융, 온라인도박 등 민생침해범죄를 막기 위해 적극 협력한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날 이원석 검찰총장과 조용병 전국은행연합회장은 ‘보이스피싱 등 민생침해범죄 대응 강화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는데요. 이 총장은 “보이스피싱 범죄는 평생 모은 재산을 한 번에 가져가는 가장 악랄한 민생침해 범죄”라면서 “범죄가 발생한 후 처벌하는 것보다 금융권과 협력해 사전에 범죄를 막아 피해를 예방하고 확산을 차단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조 회장은 “은행권은 대검찰청과 함께 민생침해 범죄 예방과 차단을 위해 적극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화답했죠.
양측은 예금계좌가 온라인 불법도박 등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민생침해 범죄에 악용되지 않도록 필요한 금융조치를 도입하고, 새로운 범행유형이나 수법 등을 법령상 가능한 범위에서 공유하는 등 협력을 통해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 예방, 확산 차단에 힘쓰기로 했습니다.
누구나 당할 수 있지만, 예방과 구제가 쉽지 않은 보이스피싱 범죄. 금융당국과 수사기관의 노력으로 ‘시민덕희’ 속 카타르시스가 현실에서도 재현되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