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카타르 아시안컵 8강행 팀이 속속 결정되면서 분위기도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대표팀은 30일(현지시간) 카타르 알라이얀의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16강전에서 4-2로 승리했습니다. 한국은 연장전까지 120분간 사우디아라비아와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뒤, 승부차기에서 4-2로 마무리하며 8강행 티켓을 거머쥐었죠.
한국의 이번 승리는 값졌습니다. 앞선 조별리그에서 졸전 끝에 1승 2무를 거둬 조 2위의 성적으로 16강에 오른 터라 여론의 질타도 거셌는데요. 클린스만호는 강팀을 상대로 모처럼 극적인 승부를 펼치면서 분위기를 다시 끌어올렸습니다.
그러나 한국과는 반대로 침울하게 경기장을 떠난 팀도 숱합니다. 아시안컵에서 탈락한 팀 감독의 경우 해당 국가 축구 팬들의 거센 비난을 받고 있기도 하죠. 아시안컵이 8강전을 앞둔 만큼, 팀별 상반된 분위기는 더욱 심화하는 중입니다.
이번 아시안컵은 볼거리로 풍성합니다. 한국만 보더라도 손흥민(토트넘), 황희찬(울버햄프턴), 김민재(바이에른 뮌헨), 이강인(파리 생제르맹) 등 유럽 빅리그에서 뛰는 선수들로 최정예 팀을 꾸렸고요. 일본은 구보 다케후사(레알 소시에다드), 미나미노 다쿠미(AS 모나코) 등 엔트리 26명 무려 20명이 유럽파입니다.
지난 카타르 월드컵에선 한국과 일본, 호주 등 세 팀이 16강에 올랐고,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 중동 팀의 선전으로 아시안컵에도 이전보다 많은 관심이 쏠린 상황인데요. 여기에 세계적인 ‘명장’들이 더해지면서 더욱 풍성한 볼거리를 완성했죠.
먼저 한국을 이끄는 클린스만 감독은 대표적인 스타 선수 출신입니다. 독일 대표팀 스트라이커 출신인 그는 슈투트가르트, 인터밀란, 모나코, 토트넘, 바이에른 뮌헨 등을 거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1987년부터 국가대표로 뛴 그는 통산 108경기에 출장해 47골을 넣었는데요. 이는 독일 대표팀 역대 출장 6위, 역대 득점 4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1990년 국제축구연맹(FIFA)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서독 대표팀의 핵심 스트라이커로 뛰며 우승을 이끈 주역입니다.
감독으로도 2006 월드컵에서 개최국 독일을 3위로 이끌었고, 2014 브라질월드컵에선 미국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선수로서 월드컵과 유로 모두 우승 경험이 있는 클린스만 감독은 2013 북중미 월드컵에서 미국을 정상으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이끄는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도 현역 시절 클린스만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공격수였는데요. 감독 이력은 훨씬 화려합니다. 만치니 감독은 맨체스터 시티를 44년 만의 잉글랜드 프리미어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활약으로 이탈리아 인터밀란은 세리에A 3연패를 달성했고, 이탈리아 대표팀은 53년 만에 유로 2020 정상을 밟았죠. 지난해 8월 사우디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후 첫 4경기에선 1무 3패로 부진했지만, 이후 8경기 연속 무패(6승 2무)를 기록했습니다. 이번 아시안컵 조별리그 F조에선 2승 1무로 1위에 올랐죠. 만치니 감독의 연봉은 2500만 유로(약 361억 원)에서 최대 3000만 유로(약 43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과 사우디의 16강전은 1990년대 각각 독일과 이탈리아 축구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이름을 날린 클린스만과 만치니 감독의 맞대결로도 관심을 모았습니다. 두 감독은 공교롭게도 1964년생 동갑으로 현역 시절 세리에A 무대에서 함께 경쟁했죠. 지도자로선 만치니 감독이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지만, 선수로서는 클린스만 감독이 앞선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국내 축구 팬들의 관심은 아랍에미리트에도 쏠렸습니다. ‘벤버지’ 파울루 벤투 감독이 팀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죠. 벤투 감독은 한국 감독 시절 ‘빌드업 축구’를 밀어붙이면서 카타르 월드컵에서 과정과 결과,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밖에도 과거 일본을 지휘했던 필립 트루시에 감독이 베트남을 이끌고, 스페인 라리가 득점왕 출신의 후안 안토니오 피치 감독이 바레인을 지휘했는데요. 과거 북한 대표팀, K리그 인천을 이끈 욘 안데르센 감독은 홍콩을, ‘카잔의 기적’으로 기억되는 신태용 전 축구대표팀 감독은 인도네시아 사령탑으로 활약했죠.
사우디전은 명장들의 대결다웠습니다. 사우디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56위로 한국(23위)보다 한참 처지지만, 스리백과 포백을 넘나드는 완성도 높은 수비 전술을 이식하면서 한국을 몰아붙였죠.
사우디는 조별리그에서 페널티킥으로 1골만을 내줬는데요. 16강전에서도 한국과 박진감 넘치는 승부를 펼쳤습니다. 클린스만호는 정규시간 종료 직전 조규성의 극적 동점골로 기사회생했고, 승부차기에서 골키퍼 조현우(울산)의 활약을 앞세워 어렵게 8강 진출을 확정했죠.
그런데 만치니 감독은 조현우가 사우디의 3, 4번째 키커의 슈팅을 연속으로 막아내자, 그라운드를 떠나 눈길을 끌었습니다. 결과가 확정되기도 전에 패배를 직감한 듯 경기장을 벗어난 겁니다.
카타르 매체 알카스에 따르면 이번 대회에 나선 각국 사령탑 가운데 만치니 감독에 이은 연봉 2위는 클린스만 감독인데요. 클린스만 감독의 연봉은 약 28억 원으로 추정됩니다. 만치니 감독의 12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죠.
만치니 감독은 경기장을 일찍 떠난 데 대해 “사과한다, 경기가 끝난 줄 알았다”면서 “누구든 존중하지 않으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는데요. 패인을 묻자 “축구는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면서 “우리가 잘했지만, 상대가 강했다”고 답했죠.
그러나 만치니 감독이 사우디 축구 팬들을 납득시키는 데엔 실패한 것 같습니다. 현재 그의 인스타그램에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데요. 일각에서는 그가 일찍 경기장을 뜬 이유가 사우디 선수들이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만치니 감독은 역습을 통해 추가골로 승부에 쐐기를 박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으나, 사우디 선수들은 냅다 경기장에 드러눕는 ‘침대 축구’를 벌였다는 겁니다. 실로 중계 카메라엔 연장전 내내 수비 라인을 올리라고 외치거나, 쓰러져 나뒹구는 사우디 선수들에게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만치니 감독의 모습이 포착된 바 있죠.
다음 달 2일 타지키스탄과 요르단의 경기로 8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요. 3일 한국과 호주, 같은 날 16강 7, 8경기에서 승리한 두 팀의 경기, 4일 카타르와 우즈베키스탄의 경기가 펼쳐집니다.
이 중 한국과 8강전을 치르는 호주는 선수들 체격이 가장 좋습니다. 8강전까지 휴식시간도 나흘로 한국보다 이틀이나 많죠. FIFA 랭킹도 25위로 한국과 근소한 차이를 보입니다. 호주를 지휘하는 그레이엄 아널드 감독도 자국 레전드 선수로 꼽히는데요.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호주의 16강 진출을 이끈 바 있죠. 호주와의 8강전은 쉽지만은 않을 전망입니다.
한국이 속한 E조에서 1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한 바레인은 31일 일본과 8강 티켓을 놓고 격돌합니다. 안토니오 피치 감독은 “한국과의 경기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었고, 이전에 호주(2-0 패배)와도 경기했다. 강한 국가대표팀을 상대할 때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더 강하게 만든다“며 “일본은 강점이 많은 강인한 팀이지만, 정상에 오르기 위해 활용해야 할 약점도 갖고 있다. 우리의 철학을 실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의지를 다졌습니다.
한국이 극적으로 8강에 진출하면서 클린스만 감독도 한시름 덜게 됐습니다. 앞선 조별리그 3경기에서 부진한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클린스만 감독을 향한 비판 여론은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황이었죠. 뚜렷한 전술 없이 선수 개인 능력에 의존하는, 이른바 ‘해줘 축구’라는 조롱 섞인 비난까지 나왔습니다.
한국이 4-2로 사우디전에서 승리하면서 8강에 진출하긴 했으나, 클린스만 감독이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사우디전에서 파격적인 스리백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후반 시작과 동시에 전술이 무너져 포백으로 전환하면서 사실상 실패했다는 분석이 나오기 때문이죠.
몇 차례 결정적인 슈팅을 놓쳤다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무려 22개의 슈팅을 때렸고, 사우디아라비아(14개)보다 8개나 많았는데요. 유효슈팅도 8대 4로 2배였습니다. 볼 점유율도 58% 대 42%로 앞섰죠. 하지만 득점은 겨우 1골뿐이었습니다.
우승 후보인 한국을 상대하는 팀들이 밀집 수비 대형으로 경기에 임할 것임은 예상된 일이었습니다. 클린스만 감독은 상대의 노골적인 견제와 수비라인을 깨뜨릴 만한 전술을 준비했어야 한다는 건데요. 경기를 보면 손흥민, 이강인 등 선수 개인의 능력으로 겨우 풀어나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게다가 호주는 사우디보다 FIFA 랭킹도 높은, 훨씬 강한 상대입니다. 조별리그부터 2승 1무로 순항을 시작한 데다가 28일 16강전에서도 인도네시아를 대파, 체력까지 비축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일부 선수들에겐 하루 이틀의 휴가까지 부여했죠.
반면 한국 주전들은 조별리그부터 16강까지 거의 풀타임으로 경기를 소화하며 애썼습니다. 사우디전에선 연장 120분간 고군분투하고 승부차기까지 나섰죠. 8강 이후부터는 체력 회복이 관건인데, 향후 일정도 호주에 유리한 상황입니다. 클린스만 감독도 사우디전을 마치고 ”휴식을 더 챙기기 위해 조 1위를 노렸다. 일본을 피하려고 조 2위를 한 것이 아니다. 조 2위라서 이런 일정을 받아들여야 했다“며 조 1위를 놓친 조별리그를 언급했습니다.
어느 하나 쉬운 것 없는 호주전인데요. 8강이야말로 클린스만 감독의 전략과 전술이 중요한 무대입니다. 호주와의 8강전은 한국 시간으로 다음 달 3일 0시 30분에 치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