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텀블러 벗어나 패션 아이콘으로
2011년 커피 브랜드 스타벅스가 1ℓ에 육박하는 초대형 컵을 내놨다. ‘벤티’보다 더 큰 ‘트렌타’였다. 이탈리아어 숫자 30을 뜻하는 트렌타의 용량은 31온스, 약 0.92ℓ였다. 누군가에게는 마시기 버거울 만큼 커다란 크기다. 반면, 스타벅스 마니아들은 트렌타의 등장에 열광했다.
1ℓ에 육박하는 거대 스타벅스의 등장으로 잔뜩 긴장하기 시작한 브랜드는 차(車) 회사였다. 미국에서 스타벅스가 컵 크기를 키울 때마다 미국 빅3 자동차 회사는 자존심을 지켜가며 맞서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번번이 실패였다. 우리 기준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미국 소비자는 차를 고를 때 컵홀더 개수, 나아가 크기를 꽤 중요시한다.
결국, 스타벅스가 컵 크기를 키울 때마다 픽업트럭을 생산하는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 스텔란티스 등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에 따라 컵홀더 크기를 키워야 했다. 소비자의 요구와 시장의 트렌드가 자동차 기업을 움직인 사례다.
최근 미국 아웃도어 용품 브랜드 '스탠리(Stanley)'가 스타벅스와 협업해 출시한 밸런타인데이 한정판 텀블러가 큰 인기를 누렸다.
뉴욕타임스(NYT), CNBC 등에 따르면 한정판 텀블러 크기는 40온스(약 1.18ℓ)다. 가격만 49.95달러(약 6만6000원)에 달했으나 없어서 못 파는 형국에 이르렀다. 이 텀블러를 사기 위해 일부 미국인들이 매장 밖에서 밤새 캠핑을 하며 줄을 서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SNS에는 매장 밖에 줄 지어선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한 영상이 잇따라 올라오기도 했다.
매장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은 텀블러를 사기 위해 뛰어들었다. 이른바 ‘오픈런’이다. 텀블러 하나를 두고 매장 내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핑크와 빨강 두 가지로 나온 한정판 텀블러는 이미 미국 경매사이트에서 고가에 팔리고 있다. 이베이(eBay) 등에서 500~600달러(65~79만 원)에 달하는 가격에 재판매되고 있다.
NYT는 스탠리 텀블러가 밀레니얼과 Z세대,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고 소개했다.
스탠리는 올해로 설립 111년째를 맞이하는 역사 깊은 브랜드다. 애초 2차대전 당시 미군 군수품으로 '수통'을 납품하던 회사다. 1913년 세계 최초의 진공 금속 보온병을 발명했고 1915년 대량생산체제를 갖춘 뒤 미군에도 납품했다. 이 보온병이 미군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2020년부터는 여러 여성 인플루언서들과 협업해 기존의 클래식한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다양한 파스텔 색조의 다양한 제품들을 출시하며 SNS 마케팅도 진행했다. 이를 바탕으로 완판 신화를 달성하기도 했다.
단순히 물을 마시는 도구에서 벗어나 액세서리의 하나가 된 것도 스탠리 텀블러 인기의 배경이다. 손잡이에 거는 액세서리ㆍ이름표ㆍ그림 스티커 등 단순한 텀블러를 소비자의 개성대로 꾸밀 수 있는 액세서리도 구매욕을 자극했다.
2019년 7300만 달러 수준이었던 스탠리의 매출은 지난해 7억5000만 달러로 4년 만에 10배 이상으로 올랐다.
최근에는 자동차 화재사고 한 건이 스탠리 텀블러의 인기에 큰 힘을 보태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미국 현지에서 기아 쏘렌토(2019년형)가 알 수 없는 원인의 화재로 전소했다. 오토블로그에 따르면 당시 운전석 기어박스 옆에 자리한 컵홀더에 스탠리 텀블러가 꽂혀있었다. 차는 불에 탔지만, 텀블러 안에 담긴 음료수는 멀쩡했다.
심지어 얼음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는 영상이 SNS에서 화제가 됐다. 스탠리 텀블러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의 조회 수는 9억 회를 넘기도 했다.
한국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역시 해외시장 분석을 통해 스탠리 텀블러의 인기를 분석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마케팅 기법에 따라 브랜드의 역사가 새로 쓰일 수 있다는 점에 특히 주목했다.
KOTRA는 “타이어 제조사 미쉐린이 '미슐랭 가이드'를 발간하지 않았다면 소비자는 미슐랭 식당을 찾아다니지 않을 것”이라며 “발이 편안한 고무 슬리퍼로 유명한 브랜드 크록스 역시 다양한 색채와 귀엽고 개성 있는 배지를 부착하는 아이디어가 없었다면 투박한 고무 슬리퍼에 그쳤을지 모른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