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등 HBM 선수금으로 추정
선수금으로 관련 투자 나서… 선순환
SK하이닉스의 유동 부채가 지난해 1조 원 넘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유동부채는 1년 이내에 상환해야 하는 채무다. 일반적으로 유동부채 증가는 기업의 지급 능력이 악화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SK하이닉스의 경우는 다르다.
이른바 착한 부채인 '계약부채' 급증이 그 원인이다. 계약부채는 선수금이나 반품부채를 통칭하는 회계용어다. 고객사로부터 제품 공급 계약 이행 등을 조건으로 미리 받은 돈을 말한다.
SK하이닉스의 효자 상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가 인공지능(AI) 열풍과 함께 인기가 치솟으면서, 고객사들이 HBM을 구매하겠다며 미리 돈을 건넨 것이 '계약부채'로 잡힌 것이다.
13일 SK하이닉스가 공개한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유동부채는 21조 원으로, 전년 19조8400억 원보다 1조1200억 원 늘었다. 늘어난 항목을 보면 특히 기타유동부채가 급증했다. 전년 5340억 원에서 작년 1조8820억 원으로 증가했다.
더 들여다보면 기타유동부채 내 계약부채 급증이 그 원인이다. 계약부채는 작년 말 기준 1조5885억 원이다. 지난해 3분기 2566억 원에서 한 개 분기 만에 1조3319억 원 증가했다.
이처럼 1조 원이 넘는 대규모 금액이 계약부채로 들어온 것은 이례적이다. 최근 5년 간을 살펴보면, SK하이닉스 계약부채는 각각 △800억 원(2018년) △870억 원(2019년) △964억 원(2020년) △1254억 원(2021년) △3456억 원(2022년)에 불과했다.
지난해 4분기 계약부채 급증에 대해 업계에선 엔비디아로부터 받은 HBM 관련 선수금이 반영된 결과일 것으로 추정한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10월 3분기 컨퍼런스콜에서 "HBM 캐파가 현시점에서 솔드아웃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업계 관계자는 "안정적으로 HBM 물량 확보를 원하는 엔비디아의 의지가 상당 부분 반영된 것"이라며 "SK하이닉스도 거액의 선수금을 HBM 역량 확대를 위한 투자에 사용할 수 있어 윈윈이다"라고 말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HBM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올해에만 첨단 반도체 패키징 공정에 10억 달러(약 1조 3119억 원) 이상을 투자할 계획이다. 지난해 HBM 공급을 조건으로 받은 선수금이 그대로 HBM 투자에 쓰이는 셈이다.
SK하이닉스는 기술 혁신을 통해 반도체의 전력 소비를 줄이고 성능을 높이며 HBM 시장에서 선두 자리를 확고히 한다는 방침이다.
SK하이닉스는 신규 투자의 대부분을 몰디드 언더필(MR-MUF)로 불리는 새 패키징 방식과 실리콘관통전극(TSV) 기술 발전에 쏟아붓고 있다. MR-MUF는 여러 개의 D램을 쌓아 연결할 때 실리콘층 사이에 액체 물질을 한 번에 주입하고 굳히는 방식이다. 방열과 생산 수율 향상에 유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강욱 SK하이닉스 부사장은 "반도체 산업의 첫 50년은 칩 자체의 디자인과 제조에 관한 것이었지만 앞으로 50년은 후공정, 즉 패키징이 전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HBM은 D램 여러 개를 수직으로 연결해 데이터 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끌어올린 고성능 메모리다. 1세대(HBM)-2세대(HBM2)-3세대(HBM2E)-4세대(HBM3)-5세대(HBM3E) 순으로 개발되고 있다.
현재는 SK하이닉스가 AI의 핵심인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한 엔비디아에 HBM3를 사실상 독점 공급하며 HBM 시장 주도권을 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