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발렌시아가는 최근 무질서라는 주제로 2024 F/W 컬렉션을 열었습니다. 이번 컬렉션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무엇보다도 ‘테이프 팔찌’(Tape Bracelet)였는데요. 동네 문구점이나 편의점, 마트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투명 테이프와 똑같은 외관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제품은 실제로도 해당 제품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차이점이라곤 제품 안쪽에 발렌시아가 로고가 박혀 있다는 정도인데요. 이 팔찌의 가격은 3000유로, 우리 돈으론 약 432만 원입니다.
다수의 네티즌은 ‘저게 400만 원대라니’, ‘난 다이소에서 1000원으로 해결할 수 있다’ 등 냉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세속적인 패션계에 던지는 농담’, ‘재밌고 기발하다‘ 등 호평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발렌시아가가 희한한(?) 패션 제품을 출시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사실 발렌시아가뿐 아니라 많은 패션 브랜드가 패션에 일상의 요소를 접목하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는데요. 당연히 호평만 나오진 않습니다. 되레 ‘이런 걸 돈 받고 파냐’ 등 비난이 나오기도 하죠. 그렇다면 명품 브랜드들이 냉담한 반응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같은 제품들을 출시하는 이유는 뭘까요?
발렌시아가는 일상의 저가품을 하이엔드 패션 아이템으로 승화하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발표한 테이프 팔찌뿐 아니라 다양한 물건을 패션에 적용하면서 화제를 빚어왔죠.
2022년에는 F/W 컬렉션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쓰레기봉투’를 공개했습니다. 쓰레기봉투에서 영감을 받은 ‘트래시 백’(Trash Bag)은 발표 당시 대표적인 시즌 아이템으로 큰 화제를 빚었는데요. 그야말로 우리가 일상에서 늘 사용하는 검은색 혹은 흰색 비닐봉지를 연상케 하는 디자인이었습니다. 당시 런웨이에는 눈 내리는 모습이 연출됐는데, 트래시 백을 들고 성큼성큼 발을 옮기는 모델들을 본 네티즌들은 “밤에 쓰레기봉투를 밖에 내놓으러 가는 내 모습 같다”며 황당해했죠.
이에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 바살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쓰레기봉투를 만들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며 재치 있게 응수했는데요. 네티즌들의 의아한 눈초리에도 트래시백은 1790달러(한화 약 235만 원)에 공식 출시됐습니다. 비닐 소재가 아닌 송아지 가죽으로 만들어진 이 가방은 매장 진열과 동시에 인증 사진이 온라인상에 앞다퉈 올라오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뎀나 바살리아는 발렌시아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기 전 메종 마르지엘라, 루이비통 등에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예술적인 면보다 상업적인 면을 추구하는 루이비통 패션 하우스에 고민하던 그는 동생이자 비즈니스 파트너인 구람 바살리아와 함께 ‘베트멍’(VETEMENTS)을 론칭했는데요. 베트멍은 큰 어깨선, 비대칭적인 형태, 땅에 끌릴 듯 긴 길이 등 당시 패션계에선 파격적인 요소를 선보였습니다. 명품 브랜드들의 ‘럭셔리’와는 정반대인, 해체주의와 스트리트 감성을 담은 디자인으로 큰 호응을 얻었죠. 그는 베트멍에 몸담았을 때도 택배업체 DHL 로고가 들어간 티셔츠 등을 선보였는데요. 일각에서는 앤디 워홀의 수프 캔과 비누 상자처럼 바살리아의 역시 소비주의의 본성을 논하고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바살리아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일상의 평범한 시각에 기반해 어디까지 ‘평범한 것’이 패션이 될 수 있는지 늘 기대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발렌시아가는 독특한 패션 아이템을 꾸준히 선보였습니다. 지난해 초에는 파리 패션위크에서 회색 수건으로 만든 스커트를 처음 공개했는데요. 남녀공용인 ‘타월 스커트’는 925달러(한화 약 121만 원)이었죠. 이 아이템 역시 큰 화제를 빚었습니다. 이케아가 재치 있는 패러디를 내놓기도 했는데요. 영국 이케아 공식 인스타그램에는 모델이 검은색 후드티와 베이지색 바지, 검은색 신발과 선글라스, 그리고 ‘이케아 수건’을 치마처럼 두른 모습이 담긴 사진이 올라왔습니다. 발렌시아가의 타월 스커트 착장과 흡사한 모습이었죠. 여기에 이케아는 한술 더 떠 “새로운 비나른(VINARN) 타월 스커트 2024 봄 필수 패션 스타일을 소개한다”며 16파운드(한화 약 3만 원)의 금액을 강조했습니다.
이런가 하면 발렌시아가는 미국 감자칩 브랜드 레이즈와 협업한 ‘감자칩 클러치 백’을 내놓고, 구멍이 뚫리고 너덜너덜한 운동화 ‘파리 스니커즈’ 등을 출시하며 화제의 중심에 섰습니다.
발렌시아가의 이런 디자인은 대중의 갑론을박을 부름과 동시에 기존의 것을 ‘재해석’했다는 이유로 참신하다는 패션계의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시도를 하는 게 발렌시아가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프라다는 185달러(한화 약 24만 원)짜리 클립을 출시하기도 했는데요. 일반 클립과의 차이점은 끝부분에 프라다 로고가 새겨진 정도였죠. 루이비통은 쇼핑백에서 영감을 받은 쇼퍼 백, 샌드위치 백을 선보인 적 있습니다. 보테가 베네타는 무지의 종이가방처럼 생긴 브라운 백을 출시했는데, 자세히 보면 핸들 부분이 실제 종이가방처럼 돌돌 말려 있어 세밀한 요소까지 챙긴 걸 확인할 수 있죠.
명품 브랜드들이 저가품에서 영감을 얻은 고급 제품을 출시하는 건 일종의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명품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누구나 착용할 수 있는 무난한 디자인으로 대중성을 쫓기보다는, 마니아층 소비자를 확보해 색다른 멋을 제시하며 독창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하려는 시도죠.
실비아 벨레자 컬럼비아대 교수는 이런 현상을 ‘트리클 라운드’(trickle-round)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통상 유행은 상류층에서 만들어져 중류, 하류층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인 ‘트리클 다운’(trickle-down)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요. 때로는 유행이 아래 계층에서부터 상향 확산할 때가 있다는 겁니다.
일례로 광부들이 작업복으로 입던 청바지를 상류층 여성이 입은 모습이 패션지 보그에 실리며 주요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게 됐고, 트럭 운전사들이 쓰던 트러커 캡(trucker cap)을 팝스타 저스틴 팀버레이크 등이 애용하면서 유행으로 번진 일이 있었죠. 특이한 건 이 같은 유행이 중간 계층을 거치지 않고 상류층으로 바로 영향을 미쳐 이후 주류 문화를 형성했다는 겁니다.
실비아 교수는 이런 유행이 단순히 저가품을 소비하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계층을 상징할 수 있는 명품을 함께 사용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짚었습니다. 할리우드 배우 세라 제시카 파커가 벼룩시장에서 산 빈티지 재킷에 수백만 원대의 구두를 매치하는 것처럼 말이죠. 실비아 교수는 “명품이 주류가 되고 있는 세상에서 지위 상징이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부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