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인 대신 기관이 전세보증금을 갚아주는 제도를 악용한 사례가 나타나자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자체 조사에 착수했다. 악성 임대인이 전세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 반환을 위한 '임대차 중도해지 합의서' 작성을 구실로 돈을 요구한 사례에 대한 사실관계 파악에 나선 것이다.
4일 본지 취재 결과 HUG는 임대인이 전세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을 받으려면 350만 원의 돈을 내라고 요구한 사례에 대해 조사에 나선 것으로 나타났다. HUG 관계자는 "해당 사례에 대해 사실 여부를 파악할 예정"이라며 실제 피해자에게 관련 자료를 요청했다.
앞서 본지는 이달 1일 "전세 중도해지 합의서 받으려면 돈내라"…제도 허점 이용한 추가 피해 여전' 기사를 통해 임대차 중도해지 합의서를 빌미로 두 달치 지연이자 비용과 중개수수료 명목의 비용을 요구한 사례를 보도한 바 있다.
HUG는 해당 사례가 조직화된 것인지도 확인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유사한 피해를 호소한 사례가 더 있기 때문이다. B씨 역시 최근 집주인으로부터 HUG 전세보증금반환보증 2개월치 지연이자와 중개수수료를 합한 금액 400여만 원을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A씨와 B씨는 본지에 추가 피해자가 더 있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B씨는 "전세사고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이 모인 커뮤니티를 통해 이와 유사한 사례가 3건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미 합의금을 지불한 사례도 있었다"며 "A씨와도 해당 커뮤니티를 통해 교류하면서 피해자가 나 뿐만이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A씨와 B씨 사례를 비교한 결과 한 공인중개사사무소가 주도적으로 일을 벌인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도 추가로 포착됐다. A씨와 B씨는 모두 서울에 거주하고 있으나 집주인은 경기도권 거주자며, A씨와 B씨의 집주인은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A씨와 B씨 집주인이 권한을 위임했다는 공인중개사사무소는 같은 곳이었다. 사무실 소재지도 A씨와 B씨 집주인이 사는 곳과는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다.
실제로 A씨와 B씨가 집주인으로부터 받은 문자 내용마저 유사했다. A씨 집주인은 "나라에서 정해놓은 부동산 정책 및 세금 문제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며 "세입자분들은 제가 모두 보증보험에 가입했기에 보증금에 대한 문제는 절대 발생시켜 드리지 않기 위해 문자를 남겨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혹시나 거주하시다가 생기는 압류, 가압류 이러한 부분 때문에 불안하시는분들은 00부동산 000님한테 연락하셔서 상담 받으시길 바란다"며 "앞으로는 집 문제에 관하여는 담당부동산에 모든 권한을 위임드렸으니 부동산으로 연락 부탁드린다"고 적었다. 문법에 맞지 않은 부분까지 B씨가 집주인에게 받은 내용과 일치했다.
현 상황에서 A씨와 B씨 등 세입자들은 집주인의 요구에 응하거나 불안 속에 남은 전세계약 기간을 버티는 방법밖에는 없는 실정이다. 제도를 운영하는 국토교통부와 HUG의 개선이 필요한 이유다.
대전전세사기대책위원회 자문을 맡고 있는 장주영 변호사는 "집주인 측 요구는 분명 과한 것이지만, 법적으로 문제 삼기 어려운 부분인 점을 이용해 세입자에게 부당한 요구를 한 것으로 보인다"며 "합의는 말 그대로 양 당사자 간 결정이기 때문에 불법행위라 단언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HUG관계자는 "사실관계를 파악한 뒤 문제가 있다면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센터는 물론 경찰과 협조를 통해 가능한 조치가 있는지 살펴보고 절차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